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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동문학은 무엇이 다를까?

책; 방주인 2026. 6. 2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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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작품의 주요 내용과 결말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죽음과 질병,
장애와 불안까지
어린 독자에게 보여줘도 괜찮을까?

 

아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고를 때 어른들은 이 질문 앞에서 자주 망설인다. 부모의 죽음이나 자살을 다룬 이야기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생각하고, 정신질환과 자해, 동성애와 가족 해체를 어린 독자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면 희망적인 인물과 분명한 교훈, 안심할 수 있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아동문학은 언제나 세상을 밝고 단순하게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2026년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프랑스 작가가 찾아온다. 프랑스 아동·청소년문학을 대표하는 마리 오드 뮈라이유다.

그는 그림책 작가 안느 라발, 한국의 이수지 작가와 함께 아동문학이 상상력과 현실 세계의 문제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 이야기할 예정이다. 뮈라이유와 이수지는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에서 각각 작가상과 일러스트레이터상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뮈라이유의 작품을 펼치면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소재의 무게다. 『오, 보이!』에는 어머니를 잃고 남겨진 세 남매와 백혈병, 성적 지향과 후견인 문제가 등장한다.

『생플』은 지적장애가 있는 형과 그를 시설에 보내지 않으려는 어린 동생의 삶을 다룬다. 『열네 살의 인턴십』에서는 아이의 진로를 부모의 계층의식과 성 역할에 맞추려는 폭력이 드러난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에는 자해, 학교 공포증, 가족 갈등과 인종 편견, 테러 이후의 불안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고통을 전시하거나 독자를 겁주지 않는다. 오히려 활기차고 자주 우스우며, 무엇보다 인물들이 살아 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농담하고 욕심을 부리며, 질투하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한다. 아이들은 불행을 겪었지만, 불행 그 자체가 되지는 않는다.

뮈라이유가 아이에게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순히 솔직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소설에는 어린 독자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단순하게 바꾸기보다, 그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언어와 관계를 이야기 속에 마련해주는 것이다.

물론 한 작가의 작품만으로 프랑스 아동문학 전체를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뮈라이유의 네 작품을 함께 읽으면 프랑스 아동·청소년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에게 쉬운 답을 주는 문학이 아니라, 아이가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남기는 문학이라는 생각이다.

 

현실을 감춘다고
아이가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오, 보이!』는 세 남매가 자신들이 이제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네 살 시메옹과 여덟 살 모르간, 다섯 살 브니즈는 누구도 자신들을 떼어놓지 못하게 하자고 맹세한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고, 함께 살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계단에서 굴러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지지만, 곧 아이들은 죽음의 배경에 자살이 있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이 설정만 보면 소설은 시작부터 지나치게 어둡게 느껴진다. 그러나 뮈라이유는 세 남매를 슬픔에 짓눌린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시메옹은 자신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냉정하게 가족관계를 추적한다. 모르간은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며, 어린 브니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안다.

세 남매 앞에는 아버지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두 명의 이복형제가 나타난다. 안과의사로 안정된 삶을 사는 조지안과, 직업도 생활도 불안정한 바르텔레미다.

겉으로만 보면 누가 더 좋은 보호자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사회적 조건과 실제로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르텔레미는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아이를 책임질 준비가 된 어른처럼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성적 지향도 주변 어른들에게 후견인 자격을 의심받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시메옹이 백혈병 진단을 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병원에 함께 가고, 두려움을 견디며, 누군가의 고통 옆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오, 보이!』가 흥미로운 이유는 ‘좋은 가족’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은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고 자동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돌봄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행동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작품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른들의 편견을 알아차리며, 때로는 어른보다 더 정확하게 사람을 판단한다.

이들은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삶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다. 뮈라이유는 부모의 죽음과 백혈병 같은 현실을 감추지 않지만, 아이들이 그 현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존재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상담실에 들어온 것은
아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의 무대는 심리상담실이다. 주인공 소뵈르 생티브는 상담실을 찾는 아이와 청소년,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첫 장면에서 소뵈르는 열네 살 마르고와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 마르고는 두꺼운 외투와 긴소매, 목도리와 머리카락 뒤로 몸을 감춘다.

상담이 이어지면서 그의 팔에 자해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작품은 자해를 충격적인 장면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즉시 추궁하거나, 단번에 고칠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소뵈르는 마르고가 어떤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살피며 조금씩 질문한다.

상담실에는 학교 정문 앞에만 서면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엘라도 찾아온다. 겉으로만 보면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행동이지만, 작품은 이를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아이의 몸이 말보다 먼저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뵈르의 상담실에 들어오는 문제들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학교와 가정, 또래 관계와 경제적 상황, 부모의 갈등과 사회 분위기가 아이의 불안 안으로 함께 들어온다.

 

2015년 1월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 이후, 소뵈르의 아들 라자르가 다니는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질문을 쏟아낸다.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정말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유대인이라서 공격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랍인과 테러리스트는 같은 말인지 묻는다.

아이들의 질문은 정리되어 있지 않다.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과 텔레비전에서 들은 정보를 뒤섞으며 공포와 편견을 동시에 드러내고, 교사 역시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 폭력의 여파가 어린이의 세계 밖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뉴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어른들의 불안과 혐오, 침묵을 감지한다.

뮈라이유는 아이가 이미 듣고 보고 느끼는 현실에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설명되지 않은 공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마음속에 남기 때문이다.

상담실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흩어진 경험을 이야기로 바꾸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소뵈르도 완전한 해결자는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몸짓과 침묵을 민감하게 읽는 상담가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 라자르가 무엇을 엿듣고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는 놓친다.

죽은 아내에 관한 아들의 질문 앞에서도 흔들린다. 전문성을 가진 어른조차 자신의 가족 앞에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상담은 위에서 아래로 정답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오래 듣는 과정이 된다.

 

‘정상적인 삶’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생플』의 주인공 생플은 스물두 살이지만 인지 발달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의 동생 클레베르는 열일곱 살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생플을 시설에 보내려 하지만, 클레베르는 형과 함께 살기로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클레베르는 형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지치고, 생플을 보호하려 하면서도 형이 부끄럽다.

그는 화를 내며 형이 없는 평범한 청소년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뮈라이유는 돌봄을 아름다운 희생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첫 장면부터 주변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큰 소리를 내고 낯선 개를 만지려는 생플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불편함,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생플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기 전부터 이미 다른 사람들의 판단 속에 들어가 있다.

아버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시설이다. 생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세심하게 따져본 결과라기보다,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를 사회의 바깥으로 옮기는 방식에 가깝다.

클레베르는 형을 시설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여러 젊은이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갈등은 계속된다.

생플은 물건을 망가뜨리고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며,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일으킨다.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 부담을 감당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틀리지 않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시간과 감정, 책임이 필요하며 사랑만으로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공동생활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관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클레베르만 생플을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집 안의 여러 사람이 생플과 관계를 맺는다.

생플 역시 도움만 받는 인물로 남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뜻밖의 방식으로 위로하며, 공동체의 관계를 흔들어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생플이 오래된 토끼 인형 ‘무슈 팽팽’의 목소리를 빌려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도 중요하다. 무슈 팽팽은 우스운 장난감에 그치지 않고, 생플이 직접 말하기 어려운 욕망과 분노, 두려움을 대신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누군가가 사회의 규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께 살 권리까지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플』은 장애를 극복해야 할 비극이나 감동의 재료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적인 삶의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자립이란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는 상태인지, 돌봄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지 되묻는다. 이 질문 앞에서 ‘정상’이라는 말은 점점 불안정해진다.

 

 

누가 아이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까?

『열네 살의 인턴십』의 주인공 루이는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는 열네 살 소년이다. 수학을 따라가기 어렵고 프랑스어 수업에서도 집중하지 못한다.

외과의사인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답답하게 바라본다. 학교에서 직업 체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루이의 할머니는 단골 미용실을 제안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여성 미용사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조롱한다. 아들이 미용실에서 일하는 것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내려가는 일이며, 남성다운 진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루이는 직업 체험을 시작하기 전부터 머리카락에 관심을 보인다. 여동생의 인형 머리가 엉킨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빗어주다가 어머니가 나타나자 황급히 인형을 내려놓는다.

이 짧은 장면에는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방식이 담겨 있다. 루이는 아직 미용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먼저 그것이 남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시선을 배웠기 때문이다.

미용실에 들어간 루이는 학교에서와 다른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바닥을 쓸고 외투를 받아주며 차를 나르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사람의 머리 모양과 손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형태를 만드는 일 앞에서 그의 집중력이 살아난다. 학교에서는 무기력한 학생으로 불리던 아이가 미용실에서는 배우는 사람으로 변한다.

작품은 이를 “공부에는 재능이 없지만 다른 재능은 있었다”는 위로로 끝내지 않는다. 루이의 선택을 가로막는 것은 적성에 대한 무지만이 아니라, 계층과 성별에 대한 편견이다.

외과의사인 아버지는 손으로 일하면서도 미용을 낮은 육체노동으로 바라본다. 남성 미용사를 성적 고정관념으로 판단하고, 미용실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삶을 실패로 규정한다.

아들의 진로는 아이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의 분노는 결국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부모가 아이의 성공을 바란다는 말이 어떻게 아이를 억압하는 힘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명분이 상대의 욕망을 지워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보호가 아니다.

반면 미용실은 루이에게 또 다른 교육 공간이 된다. 여러 계층과 세대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손님들은 머리를 맡기면서 자신의 병과 사랑, 가족 문제와 일상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미용사는 머리카락만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된다. 루이는 기술뿐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고 기다리는 법, 타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손이 누군가의 기분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간다.

『열네 살의 인턴십』은 아이의 재능이 학교 성적표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면 어른이 자신이 가진 성공의 기준부터 의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뮈라이유의 어른들

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불완전한 어른이다.

『오, 보이!』에서 안정된 직업과 집을 가진 어른이 반드시 따뜻한 보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생활이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사람에게도 누군가의 곁을 지킬 능력이 생긴다.

『생플』의 아버지는 시설을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어린 클레베르는 형을 지키겠다고 나서지만, 그 역시 감정적으로 미숙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열네 살의 인턴십』의 아버지는 아들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 이외의 삶을 인정하지 못한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의 소뵈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전문가지만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중요한 신호를 놓친다.

 

이 어른들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저마다 사랑과 두려움, 욕망과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다.

뮈라이유는 어른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아이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른의 판단 역시 의심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동문학에서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아이를 순수하고 완벽한 존재로 그리는 일이 아니다.

뮈라이유의 아이들은 영리하지만 이기적이고, 용감하지만 겁을 먹으며, 서로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준다. 생플을 돌보는 클레베르는 형을 부끄러워하고, 루이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며 거짓말을 한다.

『오, 보이!』의 남매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이용할 줄 알며, 라자르는 아버지의 상담 내용을 몰래 엿듣는다.

아이 역시 복잡한 인간이다. 아이를 독자로 존중한다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을 허락하는 일이다.

아이를 언제나 착하고 교훈적인 인물로 정리하지 않고, 그의 욕망과 잘못, 판단 능력을 한 사람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머는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

뮈라이유의 작품에는 무거운 사건이 많지만, 읽는 내내 비장한 분위기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화는 빠르고 인물들은 자주 우스운 행동을 한다.

『오, 보이!』에서 어른들은 후견인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지만, 세 남매는 그들의 약점과 허영을 빠르게 알아차린다. 바르텔레미는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독자를 답답하게 만들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말과 태도로 장면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생플』에서는 무슈 팽팽의 엉뚱한 언어와 생플의 오해가 웃음을 만든다. 그러나 그 웃음은 장애가 있는 인물만을 향하지 않는다.

자신을 정상적이라고 믿는 비장애인들의 위선과 무능도 똑같이 우스운 것으로 드러난다.

『열네 살의 인턴십』의 미용실에서는 손님과 직원들의 수다, 직업 세계의 독특한 표현, 남성성을 증명하려는 인물들의 과장된 행동이 이어진다.

아버지가 낮춰 보는 공간이 실제로는 가장 활기차고 인간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풍자적이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에서도 상담실의 무거운 사연과 가정의 일상이 번갈아 등장한다. 소뵈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세심하게 다루다가도 집에서는 햄스터와 아이의 질문, 엉킨 생활 문제 앞에서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온다.

이 유머는 고통을 가볍게 취급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인물이 하나의 고통으로만 정의되지 않도록 지켜준다.

자해를 한 청소년에게도 취향과 자존심이 있고,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도 지성과 유머가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사랑하고 질투하며 장난치고, 부모에게 맞선 아이는 피해자인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뮈라이유의 유머는 비극을 지우지 않는다. 비극 속에서도 인물이 자신의 존엄과 생기를 잃지 않게 한다.

 

완벽한 어른은 없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의 주인공 이름인 ‘소뵈르’는 완벽한 어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상담실에서 여러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주지만 누구도 혼자 구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네 작품 전체에서 반복된다.

『오, 보이!』의 세 남매는 훌륭한 보호자 한 명에게 구조되지 않는다. 판사와 사회복지사, 의사와 이복형제, 여러 주변 사람이 불완전한 방식으로 남매의 삶에 참여한다.

『생플』에서 클레베르는 자신이 형을 책임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주택의 사람들이 두 형제를 돕고, 두 형제 역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열네 살의 인턴십』에서 루이의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할머니와 미용사들, 손님과 학교 관계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도록 돕는다.

『소뵈르 박사의 상담 일지』에서 상담가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지만, 자신의 아들과 주변 사람을 통해 다시 변화한다.

돌봄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선물이 아니다.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뮈라이유의 소설이 말하는 완벽함은 거창하지 않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상처가 사라지는 기적도 아니다.

누군가가 말할 때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틀린 판단을 고치는 것, 함께 살기 위해 규칙을 다시 만드는 것, 한 아이가 원하는 삶을 말할 때 그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프랑스 아동문학은 무엇이 다를까?

마리 오드 뮈라이유의 작품을 프랑스 아동문학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에도 교훈적인 책과 환상적인 모험담, 현실을 부드럽게 다루는 작품이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태도는 분명하다.

 

첫째, 아이와 청소년이 이미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감추지 않는다. 죽음과 질병, 장애, 정신건강, 가족 해체, 인종과 성적 지향, 계층과 직업 차별을 아동문학 바깥의 주제로 밀어내지 않는다.

둘째, 아이를 어른의 설명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아이는 질문하고 판단하며, 어른의 위선과 편견을 알아차린다.

셋째, 어른을 정답의 소유자로 배치하지 않는다. 부모와 교사, 상담가와 의사도 실수하며,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고칠 수 있는 관계다.

넷째, 교훈을 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인물이 충돌하고 자신의 편견 때문에 실패하며, 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섯째, 비극과 유머를 분리하지 않는다. 고통을 다루면서도 인물이 웃고 사랑하며 욕망할 권리를 빼앗지 않는다.

여섯째, 가족과 돌봄을 혈연과 희생의 문제로만 그리지 않는다. 친구와 이웃, 상담가와 동료, 낯선 사람까지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 참여한다.

 

이러한 특징의 바탕에는 아이를 하나의 독자로 믿는 태도가 있다.

아이에게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은 잔인한 정보를 그대로 던져준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와 인물, 유머와 상상력으로 현실에 다가갈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를 작게 보지 않는다

한국 부모와 교사가 아동도서를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책이 아이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가이다. 배려를 배우는 책, 자신감을 키우는 책, 친구 관계에 도움을 주는 책처럼 책의 효과를 먼저 묻는다.

물론 아이의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책이 하나의 정답과 행동 지침으로만 읽히기 시작하면, 문학이 지닌 불편함과 모호함은 쉽게 사라진다.

뮈라이유의 작품을 읽으며 떠오르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아이가 불편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해 중요한 현실을 설명하지 않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가 자신의 진로와 가족, 몸과 정체성에 관해 말할 때, 그 말을 어른의 기준에 맞게 고치려고만 하지는 않을까?

아이에게 죽음이나 장애, 정신건강 문제를 다룬 책을 읽힌 뒤 반드시 올바른 해석을 알려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아이가 무엇을 느꼈는지 묻고,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은 채 함께 머무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가 복잡한 세상 앞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문학이다.

 

좋은 아동문학은 아이에게 세상이 언제나 안전하고 단순하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이 복잡하고 때로는 잔인하더라도, 그 현실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고 알려준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지만 곁에 남아주는 사람이 있으며, 자신과 다른 존재와도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보여준다.

마리 오드 뮈라이유의 작품이 보여주는 아동문학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를 작고 연약한 존재로만 보지 않고, 이미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독자임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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