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엽, 프랑스 문단에 일곱 개의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여전히 학술과 문학의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 몇몇 젊은 시인들이 프랑스어로도 고전어 못지않은 위대한 문학을 꽃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나섰다. 이 젊은 시인들의 모임이 바로 라 플레야드(La Pléiade)였다. 플레야드라는 이름부터가 별자리를 뜻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일곱 시인 무리를 본떠 붙인 명칭이었다.
르네상스기의 프랑스에서 이 일곱 별은 함께 모여 프랑스 문학의 부흥을 이끌고자 했다. 그들은 프랑스어의 품격을 높이고 표현력을 풍부하게 다듬어, 모국어를 진정한 시와 문화의 도구로 격상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모국어를 향한 르네상스의 열망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는 배움과 예술의 언어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프랑스에서는 모국어인 프랑스어의 지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1539년, 프랑수아 1세가 공포한 빌레르코트레 칙령은 모든 법령과 행정 문서를 프랑스어로 작성하도록 의무화하면서,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여전히 프랑스어를 세련되지 못한 천한 방언쯤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프랑스어는 미개하고 천박한 언어로 간주되었고, 학문이나 고급 문학을 담기에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몇몇 프랑스의 젊은 시인들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왜 문학은 반드시
라틴어나 그리스어로만 써야 하지?
그들은 프랑스어로도 충분히 높은 수준의 문학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직접 만들어갔다.
그들은 프랑스어도 고전어 못지않게 풍부하고 우아한 표현력을 지닌 언어이며, 충분히 문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작품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이런 열망은 곧 하나의 문학 운동으로 결집되었다.
플레야드의 결성
1540년대 후반, 파리의 코케레 대학(Collège de Coqueret)에는 고전문헌학자 장 도라(Jean Dorat)에게 배우는 총명한 문학도들이 모여 있었다. 이 가운데 피에르 드 롱사르, 조아생 뒤 벨레, 장 앙투안 드 바이프 세 사람은 특히 뜻이 잘 맞았고, 스승 도라와 함께 새로운 시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에티엔 조델, 퐁튀스 드 티야르, 레미 벨로, 그리고 장 도라 자신까지 합세하면서 총 7명의 시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처음에 이들은 스스로를 시인의 군단’(La Brigade)이라고 불렀는데, 일곱 명이 마치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빛난다는 데서 착안해 이후에는 라 플레야드(La Pléiade)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플레야드는 원래 그리스 신화 속 일곱 자매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일곱 비극 시인을 일컫던 표현이기도 하다.
이 모임의 중심에는 피에르 드 롱사르가 있었다. 그는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맡았고,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명망 높은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한편,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조아생 뒤 벨레는 집단의 이념을 정리하고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플레야드의 시인들은 기존의 프랑스 시풍을 타파하고, 고전 양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적 르네상스를 일으키겠다는 열정으로 뭉쳐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한 문학적 모임에 그치지 않았고, 결국 1549년 뒤 벨레가 발표한 선언문 『프랑스어의 옹호와 찬양(La Défens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aise)』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피에르 드 롱사르
라 플레야드의 중심인물이었던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는 1524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외교관을 지망했지만, 청력을 잃는 바람에 진로를 바꾸게 되었고, 이후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코케레 대학에서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조아생 뒤 벨레 등 동료들과 뜻을 모아, 곧 플레야드의 대표 시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롱사르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동시대인들로부터 시인의 왕자(prince des poètes)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이는 그가 16세기 프랑스 문학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국왕의 후원을 바탕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그의 시는 프랑스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매우 다채로웠다. 롱사르는 호메로스, 핀다로스와 같은 고전 시인들을 범례로 삼아, 프랑스어로도 장중한 서사시와 고귀한 찬가를 쓸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초기에는 고전 서정시의 형식을 따르며 『오드(Les Odes)』라는 작품집을 펴냈고, 말년에는 프랑스 건국 신화를 노래하는 국민 서사시 『프랑시아드(La Franciade)』 집필에 도전하기도 했다. 비록 이 서사시는 미완성에 그쳤지만, 프랑스에서도 호메로스적 대서사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롱사르가 빛을 발한 분야는 서정시, 특히 연애시였다. 그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정신, 즉 “인생은 짧으니 오늘을 즐기라”는 태도를 프랑스어 시로 아름답게 구현해 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상드르에게(À Cassandre)」는 그러한 그의 가치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로 손꼽힌다.
이 시에서 롱사르는 막 피어났다가 금세 시들어버리는 장미꽃에 연인의 젊음을 비유하고 있다. 시간을 아끼고 사랑을 만끽하라고 노래한다.
소중한 내 사랑, 같이 가서 오늘 아침
붉은 태양 아래 막 피어난 저 장미꽃이
저녁이 된 지금 색과 향을 잃고 시들지나 않았는지 보아요.
당신의 고운 얼굴과 견줄 만큼 아름답던 그 꽃잎들이…
이윽고 자연을 원망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아, 잔인한 자연이여!
이렇게 고운 꽃도 아침에 피어나 저녁이면 시들고 마네요.”
그리고 연인을 향해 부드럽게 충고한다.
그러니, 내 사랑, 나를 믿는다면
당신 젊음이 싱그러울 때 꽃처럼 그 향기를 누리세요.
이 장미처럼 늙음이 찾아오면
당신 아름다움도 빛을 잃고 말 테니까요.
짧은 시이지만, 순간의 아름다움과 시간의 덧없음을 노래한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감수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롱사르는 고전 신화와 자연을 시의 소재로 삼아, 인생의 쓸쓸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노래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시어는 우아하고 풍부했고, 프랑스 12음절 운율인 알렉상드랭(alexandrin)을 활용해 섬세한 리듬과 음향을 만들어냈다.
조아생 뒤 벨레
조아생 뒤 벨레(Joachim du Bellay)는 피에르 드 롱사르와 함께 플레야드를 이끈 또 하나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522년 루아르 계곡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법률과 인문학을 공부한 교양인이었다. 학창 시절 롱사르를 만나 뜻을 함께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프랑스어 문학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플레야드에서 뒤 벨레는 이론가이자 선언문 작성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시인들의 사상을 정리하고 그들의 이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549년, 아직 20대 후반이던 그는 플레야드의 문학 선언이라고 할 만한 책, 『프랑스어의 옹호와 찬양(La Deffenc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oyse)』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뒤 벨레는 과감하고 열정적인 주장을 펼쳤다. 핵심은 단순했다.
프랑스어도 이제
라틴어나 그리스어 못지않은
문학 언어가 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어가 고전어에 필적할 표현력과 품격을 갖추고 있다고 역설했다. 프랑스 시인들에게 고전을 모방하되, 지혜롭게(discreet imitation) 모방하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외형을 흉내 내라는 말이 아니라, 고전 문학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자기화하라는 뜻이었다.
뒤 벨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인들의 업적을 본보기로 제시하며, 새로운 시 형식과 어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조한 부분은 프랑스어 어휘의 확장이었다.
그는 시인들이 고어(옛말)를 되살리고, 방언에서 표현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경우 새롭게 단어를 만들어 쓰라고 제안했다. 심지어 과학이나 철학의 전문 용어조차 시어로 수용하여 시의 표현 영역을 넓히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제안은 프랑스어를 지나치게 난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낳았지만, 뒤 벨레는 풍부해진 언어야말로 시인의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믿었다. 그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프랑스 시인들이 고전을 철저히 소화하고 자기 언어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말뿐이 아닌 실천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1550년경, 그는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를 본떠 프랑스 최초의 연애 소네트집을 발표했고, 이어 로마에서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시집 『탄식(Les Regrets)』을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정치적 실망,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언어에 대한 성찰 등이 담겨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시는 바로 「행복한 그 사람, 울리세처럼…(Heureux qui, comme Ulysse…)」으로 시작하는 소네트이다. 이 시에서 뒤 벨레는 고대 영웅 울리세(오디세우스)와 이아손의 모험을 인용해, 진정한 행복이란 원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있다고 노래한다.
행복하구나, 울리세처럼 멋진 여행을 마친 이여,
아니면 황금 양털을 쟁취하고 돌아온 이아손처럼 말이오.
저들처럼 견문과 지혜 가득 안고 돌아와
여생을 가족들과 함께 사는 이여!
이후 시인은 고향 마을의 굴뚝 연기, 낡은 집, 조용한 시냇물을 그리워하며 노래한다.
아아, 언제나 다시 볼까, 내 조그만 마을 굴뚝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모습, 어느 계절에 다시 볼까…
언제나 다시 찾을까, 내 보잘것없는 집 울타리를 –
나에겐 그곳이 하나의 왕국이요, 더없는 낙원이라네!
이 소네트는 프랑스인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화려한 로마의 대리석 궁전보다도, 고향의 슬레이트 지붕을 더 귀하게 여긴 뒤 벨레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루아르 강변의 자연 풍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시 속에 담아, 프랑스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자 했다. 그의 시는 롱사르보다 덜 장중하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 속에 진한 애수와 따뜻한 향수가 배어 있다.
뒤 벨레는 병약한 몸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프랑스어 문학의 지평을 넓힌 이론가이자 시인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그가 보여준 문학적 신념과 실천은, 라 플레야드가 단순한 시인들의 모임을 넘어 프랑스어의 미래를 이끈 하나의 지적 운동이었음을 말해준다.
모국어로 문학을 쓰겠다는 선언
앞서 소개한 뒤 벨레의 『프랑스어의 옹호와 찬양(La Deffence et 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oyse)』은 플레야드 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이룬 문헌이기도 하다. 1549년에 발표된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르네상스 시기 문예 이론의 큰 전환점을 이룬 선언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프랑스어의 가치에 대한 강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뒤 벨레는 프랑스어의 문학적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어가 고전 언어인 라틴어나 그리스어 못지않게 훌륭한 문학 창작 수단이고, 충분히 위대한 작품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현실적인 근거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당시 프랑수아 라블레와 같은 작가들이 이미 프랑스어로 뛰어난 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고, 왕실 또한 프랑스어의 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 벨레는 이러한 흐름에 고무되어, 프랑스 왕을 우리의 훌륭한 왕이자 아버지라고 불렀고, 프랑수아 1세와 그 후계자들이 예술과 학문을 장려한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왕이 콜레주 드 프랑스(인문학 연구기관)를 창설하고, 왕립 도서관을 확장하는 등 문예 부흥에 기여한 덕분에 자신들 또한 프랑스어로 창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언어를 풍부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뒤 벨레는 단지 찬양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어를 어떻게 문학 언어로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제안도 내놓았다. 그는 프랑스 시인들이 라틴어나 그리스어의 고전을 탐독하고, 그 안에서 어휘와 표현을 절제 있게 차용하되, 단순한 모방이 아닌 창조적 변형을 할 것을 권했다. 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의 형식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라고 제안하면서, 프랑스에는 당시 아직 생소했던 소네트, 비극 희곡 등의 장르를 소개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프랑스어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방안도 제시했다. 고어(옛 프랑스어 표현)의 부활, 지방 방언의 흡수, 필요하다면 새로운 단어의 창조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는 심지어 철학이나 과학의 전문 용어도 시어로 끌어들여 표현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어휘 실험은 단기적으로 혼란을 낳을 수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어의 어휘력을 강화하고, 표현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뒤 벨레가 바란 대로 프랑스어는 우아하고 품격 있는 언어로 거듭나기 위한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낡은 시풍과의 단절은 또 하나의 선언이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는, 기존의 시풍과 과감히 결별하자는 선언이다. 그는 중세 말기의 운문이나 궁정에서 유행하던 단조롭고 형식적인 시들을 진정한 문학이라 보기 어렵다고 혹평하며, 이제는 새롭고 세련된 프랑스 시를 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시인은 과거의 권위에 기대지 말고,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며 문학을 혁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옹호와 찬양』은 프랑스 시인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창조적 도전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라틴어에 기죽지 말고,
이탈리아어를 부러워하지 말라.
당신의 모국어로 위대한 시를 써라!
이러한 외침은 당대의 젊은 문인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고, 프랑스 문단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선언은 곧 프랑스어 문학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뒤 벨레 자신을 포함한 플레야드 시인들의 활동을 통해 현실로 이어졌다.
시 형식의 혁신과 고전 양식의 도입
플레야드의 시인들은 단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작품을 통해 프랑스어 시 형식의 혁신을 이뤄냈다. 그들이 도입하거나 부활시킨 시 형식은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운문 양식과는 뚜렷이 구별되었고, 프랑스 시 문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이탈리아식 소네트의 도입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소네트(Sonnet)의 도입이었다. 소네트는 원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즐겨 쓰던 14행 정형시로, 플레야드 이전까지는 프랑스 문학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던 양식이었다. 뒤 벨레와 롱사르는 이탈리아식 연애시 형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프랑스어로 수많은 소네트를 창작했고, 이로써 소네트는 16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에서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네트의 정착은 프랑스 시에 형식미와 감정의 응축이라는 미덕을 더해주었다. 14행이라는 짧고 정형화된 틀 안에 감정을 압축해 담는 기법은 이후 수세기 동안 프랑스 시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자체로 하나의 유산이 되었다.
2. 알렉상드랭의(alexandrin) 부활
그리고 눈에 띄는 혁신은 알렉상드랭(alexandrin), 즉 12음절 운문의 부활이다. 알렉상드랭은 원래 중세 프랑스 서사시에서 사용되던 형식이었지만, 르네상스 시기에는 다소 잊힌 상태였다. 플레야드 시인들은 이 전통을 되살려 프랑스어 시에서 가장 장중하고 음악적인 리듬으로 알렉상드랭을 자리매김시켰다.
플레야드 이전의 시들이 주로 8음절 또는 10음절로 구성되었던 것에 비해, 12음절의 알렉상드랭은 보다 서정적이고 격조 높은 분위기를 구현하는 데 탁월했다. 이후 프랑스 시문학에서 알렉상드랭은 가장 표준적인 운율로 자리 잡으며, 수세기 동안 사랑받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3. 고전 양식의 실험과 수용
플레야드는 단순히 외래 형식을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전 시대의 다양한 시 양식을 실험하고 불어 시문학에 접목시켰다. 롱사르는 호라티우스와 핀다로스의 영향을 받아 서정적 송가(오드, ode)를 프랑스어로 작시했고, 아나크레온의 전통을 따라 술과 사랑을 노래하는 주연가도 창작했다. 그들의 시에는 신화적 주제와 철학적 사유, 그리고 인간 감정의 섬세한 결이 자유롭게 담겼다.
에티엔 조델 등 동료 시인들은 비극 희곡을 프랑스어로 쓰는 데 도전했고, 그중 조델의 작품 『클레오팽 드메지르(Cléopâtre captive)』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비극으로 손꼽힌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의 형식과 주제를 적극 수용한 시도는 프랑스 문학을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풍요롭게 만들었다.
4. 낡은 형식과의 결별
플레야드의 형식 혁신은 단순한 도입이 아니라, 의도적인 결별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들은 중세 시가의 유산이었던 발라드, 롱드 등의 운문 형식을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뒤 벨레는 『프랑스어의 옹호와 찬양』에서 이러한 형식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며,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감정과 사상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단순한 운율 맞춤에서 벗어나, 시를 사상과 미학을 담는 그릇으로 인식했다. 과감한 수사, 풍부한 이미지, 고전적 주제의 도입은 시를 보다 고차원적인 예술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변화는 일부 보수적인 문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젊은 시인들과 당대의 감성에 민감한 독자들 사이에서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5. 전통의 탈피, 고전의 재창조
요약하자면, 플레야드 시인들의 형식 실험은 단순한 외래 모방이나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세의 낡은 전통에서 탈피하는 동시에, 고전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프랑스 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항상 모방하되, 창조적으로 모방할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 결과 프랑스 시는 비로소 유럽 문예 부흥의 흐름 속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모국어 문학의 새로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표준어의 토대된 시인들의 결심
플레야드가 남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프랑스어 문어체 발전에 기여한 점이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프랑스어가 정형화되고 세련된 문체를 갖추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무엇보다, 플레야드 시인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어는 어휘와 표현에서 폭발적인 확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뒤 벨레와 동료들은 기존에 일상어로 여겨지던 프랑스어를 문학적 언어로 격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어휘 실험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잊혀졌던 옛말이 다시 사용되었으며, 지방어 표현들도 전국 문학 독자층에 소개되었다.
비록 이 중 일부는 일시적으로 쓰이고 사라졌지만, 상당수는 현대 프랑스어의 어휘 자산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롱사르를 비롯한 시인들이 사용한 라틴어·그리스어계 신조어들은 이후 프랑스 시어 또는 일반어로 흡수되었고, 이는 프랑스어 문체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플레야드는 프랑스어 문법과 작법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모국어로 고도의 문학을 쓰려면, 언어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플레야드 시인들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문헌을 번역하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어 문장의 구조와 리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프랑스어 문장이 라틴어처럼 우아하면서도 자국어다운 자연스러움을 지닐 수 있을지를 탐구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고민과 실험은 17세기 초 말헤르브(Malherbe) 등의 시인이 보다 엄격한 프랑스어 시 문법을 정립하는 데 자극제가 되었다. 실제로 17세기에는 플레야드의 언어 실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언어 순화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프랑스어 표준어를 정제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플레야드가 쌓아 올린 언어적 자신감 위에서, 후대 문인들은 “너무 과한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자”는 태도로 절충과 조율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궁극적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635년 설립된 프랑스 학사는 프랑스어의 규범을 정립하고 어휘를 선별·정리하는 작업을 공식화했으며, 그 초석은 플레야드 시인들의 언어 실험과 철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 벨레가 『프랑스어의 옹호와 찬양』에서 제시한 여러 제안은 이후 프랑스어 문법서와 사전 편찬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처럼 플레야드의 활동은 르네상스기의 활력과 고전주의기의 엄격함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문어체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라 플레야드의 시인들은 비록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떠났지만, 남긴 문학적 유산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문화 속에 깊이 살아 있다. 이들은 모국어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언어와 문학의 지평을 스스로 넓혀간 개척자들이었다. 프랑스어가 오늘날 세계 주요 문학 언어로 자리매김하고, 그 발음의 음악성과 표현의 섬세함으로 찬탄을 받는 데에는, 바로 이 르네상스 시기 플레야드 시인들이 이끌어낸 문학적 변혁의 자취가 깃들어 있다.
그들은 중세의 잔재에서 벗어나 프랑스 문학에 새로운 숨결과 고전을 향한 시선을 동시에 불어넣었으며, 모국어로도 인류 보편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피에르 드 롱사르와 조아생 뒤 벨레를 중심으로 한 일곱 시인의 열정은 마치 하늘의 별무리처럼 반짝였고, 그 빛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프랑스어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환히 타오르고 있다.
라 플레야드는 단지 하나의 문학 운동이 아니라, 언어를 예술로 승화시킨 정신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 유산은, 오늘 우리가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시를 읽고, 느끼고, 쓰는 모든 순간에 여전히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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