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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뉴스, 정보

보존과 파괴의 경계, 책을 버리는 도서관

by 장래희망 책방주인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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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 파괴의 경계, 책을 버리는 도서관

 

도서관은 왜 책을 버릴 수밖에 없을까?

도서관. 우리는 이 단어만 들어도 책이 가득 꽂힌 선반과 조용한 독서 공간, 그리고 지식이 안전하게 보관된 장소를 떠올린다. 도서관은 언제나 책을 모으고, 지키고, 나누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런 도서관이 스스로 책을 버린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이 사실에 당황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다. 아직 멀쩡한 책이 컨테이너에 담겨 폐기되거나, 리싸이클링 창고로 옮겨지는 광경은 어떤 이에게는 문화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은 그만큼 강하다.

하지만 현실 속 도서관은 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때로는 책을 선별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은 프랑스에서는 désherbage(잡초 제거)라 불른다. 마치 정원사가 잡초를 솎아내듯,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활용되지 않는 자료를 도서관 장서에서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잡초 제거는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한 조치이자, 살아 있는 장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식 생태계의 순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위는 도서관이 단지 보존의 공간이 아니라 선택의 공간임을 드러내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désherbage

 

'책을 제거한다'는 것의 정의

도서관에서 ‘책을 제거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책을 쓰레기통에 넣는 일이 아니다. 프랑스 도서관 운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désherbage(잡초 제거)는, 체계적인 기준과 절차에 따라 장서를 선별하고 정비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

이 용어는 원예에서 유래한 말로, 정원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불필요한 식물을 솎아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책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풍성한 지식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오래되고 활용되지 않는 자료들은 새로운 정보의 흐름을 방해하고, 이용자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며, 물리적 공간의 효율성을 저해한다. 따라서 도서관은 ‘책을 보존하는 곳’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장서를 갱신하고 정돈해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책을 désherbage하는 사서들

 



Françoise Gaudet는 그의 저서 『도서관에서의 잡초 제거(Désherber en bibliothèque)』에서 désherbage를 “정보의 생애주기를 고려한 필연적이고 건강한 관리 행위”로 정의한다. 그녀는 단지 낡은 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이 살아 있는 지식 기관으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désherbage는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진행된다.

1. 자료의 상태: 낡거나 훼손되어 더 이상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
2. 내용의 시의성: 정보가 시대에 뒤처졌거나, 오류가 발견된 경우
3. 이용 빈도: 수년간 대출이나 열람 기록이 없는 책
4. 중복 여부: 동일한 제목이나 유사한 주제의 자료가 과도하게 존재할 때
5. 도서관의 사명과 일치 여부: 도서관의 주제 분야, 이용자 특성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

중요한 점은, 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장서를 조정하고 순환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선택된 기억’을 유지하는 공간이라는 철학적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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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정보, 이용자를 위한 제거

도서관이 책을 제거하는 이유는 단순히 공간 확보나 책장의 정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물리적 한계, 정보의 생명주기, 이용자의 요구 변화라는 세 가지 현실적인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Désherbage는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한 필연적인 선택이자, 도서관이 '살아 있는 기관'으로 기능하기 위한 전략이다.

 

1) 공간은 무한하지 않다

도서관의 서가와 보존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특히 지역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처럼 예산과 면적이 한정된 곳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수용하기 위해 반드시 오래된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국립사서협회(ABF)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책의 수는 늘어나는 반면, 공간은 고정되어 있다.
선택과 정리는 도서관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전제다."

서가가 과도하게 채워지면 신간 자료가 이용자 눈에 띄기 어려워지고, 주제별 배열도 흐트러져 정보 탐색이 어려워진다. 효율적인 장서 구성은 단지 미적 정돈이 아니라,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2) 정보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책은 시간의 흐름에 민감하다. 특히 의학, 과학, 기술, 법률, 사회 통계 등의 분야에서는 몇 년 사이에 정보가 급속히 구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2년에 출간된 인터넷 관련 서적이 2025년에도 유효할까? 새로운 발견과 기준, 제도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자료는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지식을 유포할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désherbage는 정확하고 시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정보는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쓸모 없는 것’이 될 수 있으며, 도서관은 그 유효성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3) 이용자는 변한다

도서관은 이용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용자의 변화와 수요를 반영하는 장서 운영이 중요하다.
오랜 기간 대출되지 않은 책, 열람 요청이 거의 없는 주제, 특정 계층만을 위한 협소한 관점을 가진 자료들은 désherbage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인기 순위의 반영이 아니라, 공공성과 접근성을 고려한 다면적 판단이다.

프랑스 오드센 주 도서관 네트워크는 지속 가능성과 민주적 정보 접근을 위해 "이용자 중심의 회전율 높은 장서 구성"을 강조한다. 이는 도서관이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남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과연 책을 버릴 수 있는가?, 책의 재활용

 

과연 책을 버릴 수 있는가?

도서관이 책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아무리 논리적이고 실용적이라 해도, 그것이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아니다. 특히 책을 애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 독자, 저자, 사서에게 ‘책을 버린다’는 행위는 때때로 배신이나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많은 이들에게 책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기억을 담은 그릇이자, 삶의 한 시기를 동반했던 정서적 대상이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처음 읽었던 동화를, 누군가는 논문을 쓰며 의지했던 참고서를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그런 책이 ‘이제 더는 필요 없다는 이유’로 폐기된다면, 그 판단은 단지 효율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윤리적 고민을 동반한다.

특히 작가와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의 제거가 곧 작품의 사라짐, 존재의 소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작가는 도서관에서 자신의 책이 철거되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항의하거나,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실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서관의 역할은 ‘모든 책을 영원히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다. 장서의 선택과 관리, 정리는 도서관이 감당해야 할 필수적인 책임이다.

사서들 또한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은 경우, 책을 제거하는 작업은 죄책감과 갈등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이 책이 누군가에겐 마지막 남은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도서관은 기억 전체를 지킬 수는 없다. 그걸 스스로에게 계속 되새긴다.”

프랑스의 한 공공도서관 사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도서관은 모든 책을 보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기억을 구성해야 하는가?

오늘날의 도서관은 단지 과거의 유산을 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정보 흐름을 조율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때로는 감정적 아쉬움을 감내하고서라도 정보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정리와 선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이 ‘무감각한 삭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서관은 공공성과 투명성, 그리고 설명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책을 버릴 수 있느냐는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맥락과 기준 속에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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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된 책의 두 번째 삶

책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각되거나 쓰레기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도서관의 désherbage 정책은 단순한 폐기를 넘어, 책의 ‘두 번째 삶’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책을 ‘죽이기’보다 ‘순환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 중이다.

프랑스의 도서관 협의체에서는 ‘지속 가능한 도서관’을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책 재활용과 순환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사용 빈도가 낮아 제거 대상이 된 책들을 지역 사회에 다시 환원하거나, 중고로 판매하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기증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 인근의 학교, 병원, 교정시설, 노인 요양기관 등에 책을 기증하거나, 별도의 “책 교환 서가”를 설치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책을 가져가고 나누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제거된 책의 두 번째 삶

 

 

이러한 순환 모델은 단지 책을 버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정보 접근권의 확장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담고 있다.

한 보고서에서 출판 산업 전반에 걸쳐 더 순환적인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공공 도서관이 이 순환 구조의 중심축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 폐기 도서의 사회적 재배치(기증, 교환, 리사이클링)
- 지역 기반의 책 순환 네트워크 구축
- 파손 도서의 분해 및 재활용을 통한 환경 부담 경감

또한, 프랑스 일부 도서관에서는 도서관 내부에 중고책 서점을 개설해 제거된 책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문화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지속 가능성도 실현하고 있다. Antoine Oury가 소개한 사례에 따르면, 이러한 중고책 판매는 단순한 경제적 효율을 넘어 “책이 다시 읽히도록 만드는 감성적 생애 연장”이라는 점에서 이용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다.

이처럼 책의 두 번째 삶을 설계하는 과정은 단순한 ‘안 버리기’가 아니라, ‘어떻게 잘 보내줄 것인가’에 대한 문화적 성찰이다. 도서관은 책을 모으는 곳이면서, 동시에 책의 마지막 여정을 품위 있게 설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제거와 보존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

도서관이 책을 제거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무엇이든 쉽게 버려도 된다고 여기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désherbage는 무분별한 폐기와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제거할지를 결정하는 균형 감각이다. 이 균형을 찾기 위한 시도는 오늘날 전 세계 도서관의 주요 과제로 자리 잡고 있다.

먼저,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을 비롯한 대형 연구 도서관들은 ‘이중 구조’의 장서 운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용자 중심의 일반 서가는 최신성과 수요를 반영해 선별적으로 운영하고, 별도의 보존 서고에는 역사적 가치나 희귀성, 미래의 연구 가치를 고려한 자료를 장기 보존한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당장은 잘 읽히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책들을 지킬 수 있는 여지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술의 발달은 디지털 보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물리적 공간에는 제약이 있지만, 스캔 및 메타데이터 기반의 전자화는 장서의 정보를 보존하면서도 효율적 관리가 가능하도록 해준다. 단, 디지털 자료 역시 파일 포맷의 수명, 저장 장치의 한계, 접근권의 불균형 등 새로운 문제를 동반하므로, 이에 대한 보완적 전략도 함께 수립되어야 한다.

지역 도서관에서는 공동 보존 네트워크를 통해 각 기관이 자료의 분담 보존을 실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도서관이 문학 분야의 오래된 책을 집중 보존하고, 다른 기관은 지역사 자료나 특정 주제의 전문서를 맡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각 도서관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전국적으로 지식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

나아가 도서관은 단지 책을 관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억과 사유의 방향을 선택하는 문화 기관이다. Désherbage는 단순히 낡은 책을 솎아내는 실무적 작업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잊지 않으려 하는가, 어떤 지식과 관점을 다음 세대에 남기고자 하는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다.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종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흔적을 전승하는 일이다. 책을 버리는 일 역시, 신중하고 통찰력 있게 다루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도서관은 책을 모두 지킬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무엇을 지킬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보존과 제거의 균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균형이 있을 때, 도서관은 비로소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현재를 움직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사라짐을 통해 기억을 지킨다는 것

 

 

책을 버린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도서관의 본질을 거스르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책을 제거한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정돈이며, 망각이 아니라 선택의 과정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책을 영원히 수집할 수 없고, 모든 기억을 안고 갈 수도 없다. 오히려 도서관이 살아 있는 지식 기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떠나보낼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Désherbage는 단순한 청소나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정보의 생애주기를 관리하고, 도서관을 현재와 미래를 위한 장소로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도서관이 그 기준과 철학을 사회와 함께 나누고, 투명하고 책임 있는 결정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제거된 책들은 지역 사회에의 환원, 순환 경제 안에서의 재사용, 디지털 보존 등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버리는 행위’를 더 넓은 보존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지속 가능한 정보 환경을 구축하려는 움직임과도 궤를 같이 한다.

도서관은 이제 더 이상 모든 책을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시대와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기억의 편집자’*다. 이 편집은 단순한 취사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관과 지식의 흐름에 대한 숙고의 결과다.

책을 버리는 일은 여전히 불편한 감정을 동반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를 되묻게 만들고,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사라짐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이어지도록 도서관은 오늘도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책을 지울 것인가, 그리고 어떤 책을 남길 것인가?
그 질문 속에서, 도서관은 어쩌면 가장 조용한 철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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