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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완벽 분석

by 장래희망 책방주인 202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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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 1942)》은 20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942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를 배경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한 평범해 보이는 청년 메르소(Meursault)의 삶을 그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표면적인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메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뒤 우연한 사건으로 사람을 살해하게 되고, 그 결과 법정에 서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그 단순한 이야기 너머에 삶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의미, 사회의 규범과 개인의 진실 같은 깊은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이번 리뷰에서는 줄거리를 따라가며 메르소라는 '이방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낯설고도 진실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무심함 뒤에 숨겨진 의미와, 그가 맞닥뜨린 부조리한 세계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완벽 분석

 

어머니의 죽음,
드러나는 낯선 감정

소설은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메르소의 담담한 독백은 충격적인 사건조차 평범한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그의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알제 시 외곽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부고를 받지만, 슬픔이나 비탄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보인다. 장례식장에서 메르소는 관 속의 어머니를 보기 제안도 거절하고, 밤새 상주 노릇을 하며 슬퍼하기보다는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

심지어 다음 날 무덤을 따라 걸을 때도 뜨거운 태양과 땀에 더 신경을 쓰는 그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낯설게 비친다. 다른 조문객들은 눈물을 흘리고 감정에 북받쳐 있지만, 메르소는 그저 피로와 햇볕에 대한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장례식에 참석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냉담하고 이상한 인상으로 남는다. 실제로 이웃 노인 살라마노는 훗날 메르소에게 “어머니를 그렇게 보낸 것을 사람들이 못마땅해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한다.

메르소의 이러한 무심한 태도는 독자에게도 충격을 준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조차 슬퍼하지 않는 인물이라니, 그는 감정이 결여된 인간일까? 하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철저히 메르소의 1인칭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의 내면에 접근할 단서를 그 스스로 제공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장례를 치르며 메르소가 생각한 것은 “상사가 나에게 이틀 간의 휴가를 줬다는 사실과 무더운 날씨”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처럼 감정 대신 구체적인 사실과 신체적 감각에 주목하는 메르소의 태도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축한 그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즉, 메르소는 세속적 감정 규범에 동조하지 않는 이방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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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무심함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메르소는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는 직장 동료였던 마리와 해변에서 우연히 재회하여 함께 영화를 보고 밤을 보내며 연인 사이가 된다. 메르소는 마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 관계에도 깊은 열정이나 헌신보다는 순간의 감각적 즐거움이 강조된다. 그는 마리의 사랑 고백에 대해 특별한 감흥을 보이지 않고, 그녀가 결혼을 묻자 "상관없다"며 원하면 결혼해도 된다는 식으로 답할 뿐이다.

메르소의 이러한 태도는 누군가에겐 솔직함으로, 다른 누군가에겐 무심한 냉담으로 보일 것이다. 그는 무의미한 사회적 언약이나 형식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마리는 조금은 서운해하지만, 그럼에도 메르소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관계는 메르소 삶의 소소한 행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의 감정 세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행복조차 깊이 느끼기보다는 햇살, 바닷물, 육체적 쾌감 같은 즉각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이렇듯 메르소의 하루하루는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며, 그는 주어진 삶을 그날그날 별 생각없이 살아갈 뿐이다. 메르소의 주변 인물들도 그의 무심함과 대비되게 묘사된다. 그의 이웃 레몽 생떼스는 다혈질적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레몽은 악명 높은 폭력배로, 애인인 아랍인 여성을 학대하다가 이웃들의 눈총을 받는다. 그는 메르소에게 애인에게 복수하려 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메르소는 특별한 거부 이유를 찾지 못해 순순히 들어준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메르소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상대의 부탁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돕는 것이다. 결국 레몽은 그 여자와 싸움 끝에 경찰서에 불려가는데, 이때도 메르소는 증인으로서 레몽 편을 들어준다.

이웃들의 시선이나 도덕적 잣대보다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행동할 뿐인 메르소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이는 그가 선악이나 사회적 규범에 관심이 거의 없는 인물, 즉 도덕적으로 무관심(amoral)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옳고 그름을 분별 못한다기보다는, 그 점에 별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의 무심함은 때로 위험한 방향으로도 작용해서,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레몽을 도와주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만든다. 이후 벌어지는 사건은 메르소의 인생을 뒤흔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어느 일요일, 레몽은 메르소와 마리를 친구의 해변 별장으로 초대한다. 모두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중, 해변에서 레몽의 옛 애인의 오빠인 아랍인 남성 두 명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앞서 레몽이 폭력을 휘둘렀던 일로 앙심을 품은 그들은 시비를 걸고, 결국 난투극이 벌어져 레몽은 흉기에 팔을 베이는 부상을 입는다. 싸움은 일단 사람들이 말려서 끝났지만, 메르소의 내적 평정은 이 시점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뜨겁게 내려쬐는 한낮의 태양, 싸움으로 인한 긴장,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인 가운데, 메르소는 잠시 혼자가 되기 위해 해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다시 그 아랍인 남성과 마주친다.

흰 모래 위, 눈부신 햇빛과 파도 소리 외에는 적막한 해변. 땀과 열기로 어지러워진 메르소의 눈앞에, 그 아랍 청년이 칼을 빼어 번득인다. 이때 메르소는 레몽에게서 빌려 가지고 있던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메르소는 방아쇠를 당긴다.

 

메르소는 왜 총을 쐈을까?

 

그는 분명 어떤 악의를 품고 해변에 나간 것도 아니었고, 아랍인을 죽일 명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에는 뚜렷한 동기나 계획이 없다. 총성이 울린 뒤 쓰러진 상대를 향해 메르소는 멍하니 네 발을 더 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다. 후에 조사 과정에서 메르소가 내놓은 유일한 설명은 햇빛 때문이었다는 말이었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눈을 멀게 했고, 극도의 더위와 긴장이 뒤섞인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해명은 합리적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합리적이지 않음이 이 사건의 본질을 보여준다. 메르소의 살인은 치밀한 의도가 아니라 우연과 부조리의 산물이다. 작가는 해변의 태양을 통한 자연의 압도적인 이미지로, 인간 삶의 비이성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측면을 상징한다.

따지고 보면 메르소가 그날 해변에 간 일부터가 연인의 권유와 이웃의 초대를 별 생각 없이 따른 결과였다.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그렇게 사소한 선택과 우연한 순간들의 연쇄로 결정되어버린 것이다. 부조리주의를 창안한 카뮈는 세상이 본래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하다고 보았는데, 메르소의 살인 사건은 바로 그런 부조리한 세계관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런 의미도 교훈도 찾기 힘든 살인의 계기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치에 맞고 의미가 있는 것인가? 메르소는 이 물음 앞에서 “아니다”라고 답하듯 무표정하게 총을 쏘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을 불러올지 그는 전혀 예견하지 못한다.

 

 

 

법정에 선 이방인

살인자 신세가 된 메르소는 곧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여기서부터 소설 2부의 막이 오른다.

감옥에 수감된 메르소는 처음 겪는 상황에도 비교적 잘 적응한다. 바깥세상의 자유를 잃은 대신, 그는 자기 내면의 감각에 더욱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그도 법정에 서게 되자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의 본질과 마주한다. 재판은 메르소에게 있어 단순히 범죄의 판결을 받는 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회의 심판이었다.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는 메르소의 범행 동기를 해부하려 들지만, 정작 재판의 쟁점은 살인의 구체적 정황보다도 메르소의 인격과 태도로 옮아간다. 검사는 법정에서 메르소를 가리켜 “영혼이 없는 냉혈한”이라고 몰아세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놀랍게도 살인 행위 자체가 아니라 메르소의 과거 행동, 특히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점이다.

검사는 메르소가 범행 후 보인 태연함뿐만 아니라, 범행 이전에 보였던 무감동을 문제삼는다. 사회 통념상 효자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퍼해야 마땅한데, 메르소는 그렇지 않았으니 정에 메마른 인간이며, 따라서 사람을 죽인 것도 인간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심지어 그는 메르소가 장례식 다음 날 바로 여자 친구와 즐겼다는 사실까지 들어 메르소를 도덕적 괴물로 묘사한다.

메르소의 변호인은 이러한 공격에 반박하려 애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재판정은 마치 메르소의 인격을 단죄하는 연극 무대처럼 흐르고, 방청석의 대중도 냉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다. 메르소 자신도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어리둥절해한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내 재판이 무슨 상관이지?

 

실제로 메르소는 법정에서 무죄라고 강하게 주장하지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이 무저항의 태도는 오히려 배심원들에게는 뉘우침 없는 냉혹함으로 보였을 것이다. 메르소는 재판정에서조차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연기를 거부한다.

작품은 이 재판 장면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살인은 명백히 잘못된 범죄지만, 정작 재판은 그 진짜 원인이나 개인적 사정은 외면한 채, 피고인이 얼마나 사회규범에 맞게 행동해왔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소설 속 검사의 논리는 얼핏 비약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범죄자의 인격 몰살을 통해 죄를 증명하려 드는 경우를 본다. 메르소의 경우, 그는 정말로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그 이유는 슬프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진실이지만, 사회는 그런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비정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든 엄마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카뮈의 말은 이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메르소는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규칙이란 사회가 기대하는 감정의 연기, 즉 가식일지언정 슬픈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묵시적 약속이다.

카뮈에 따르면 메르소는 거짓말을 하길 거부한 죄로 처벌받는다. 거짓말이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 느끼지 않은 감정을 느낀 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르소는 끝까지 자신이 느끼지 않은 후회를 가장하지 않았고, 결국 그 솔직함의 댓가로 사회로부터 추방당한다. 법정에서 판사는 그를 두고 무신앙의 악마, 사회의 적이라고까지 부르며 엄중히 꾸짖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방인처럼 언제나 주변을 맴돌며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던 메르소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의 적대감을 한 몸에 받는 절대적인 이방인이 된다.

재판의 결말은 모두가 예상한대로 비극적이다. 배심원은 메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단두대의 칼날 아래 목숨을 내놓으라는 판결문을 듣는 순간까지도 메르소는 특별히 애원하거나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해한다.

 

정말 내가 죽어야 하나?

 

죄목은 살인이지만, 그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 채 오해로 처형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도 한편으론 깨달음이 서서히 자리 잡는다. 법정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적대적인 눈빛을 받은 후,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가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두렵고도 참담한 깨달음이지만, 바로 그 철저한 고독이 메르소를 각성시킨 계기가 된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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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깨달음

수감된 메르소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는 좁은 감방에서 자신의 생을 되짚어보고, 다가올 죽음을 응시한다. 이때 찾아오는 마지막 시련이 바로 교도소 원목(사제)과의 면담이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원목은 메르소에게 신앙과 회개의 길을 권유한다. 신 앞에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며 끊임없이 회유한다. 그러나 메르소는 일관되게 이를 거부한다. 어머니 장례 때처럼,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거짓으로 드러낼 생각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들겠지만, 메르소는 끝까지 허위의 위안을 거절한다. 원목이 다그칠수록 메르소의 분노는 끓어오른다. 마침내 그는 폭발하여 사제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는다.

“나는 당신이나
누구보다도 확실한 나 자신과
내 인생,
그리고 다가올 죽음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자신을 심판하려 드는 신과 사회에 대고 처음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쏟아낸다.

그동안 감정을 억눌러온 메르소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삶의 진실을 향한 분노와 열정이 분출된 것이다. 이 격렬한 감정의 분출 후, 그는 오히려 마음이 깨끗이 씻겨나간 듯한 평온을 느낀다.

메르소는 차분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본래 자기에게 무관심한 곳임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는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삶이나 죽음이 대단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에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gentle indifference of the world)에 자신을 내맡기며 평화롭게 느낀다.

이 순간 메르소는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인간’에 이르게 된다. 부조리주의에 따르면 인생에는 본래 뚜렷한 의미나 이성이 없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기에 세계와 충돌을 빚는다. 그 갈등을 깨달은 사람은 세 가지 선택지에 놓이는데, 첫째는 자살로 도피하거나, 둘째는 종교나 어떤 신념에 의탁하여 허울의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셋째는 이 부조리를 받아들이면서도 끝까지 삶을 반항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카뮈는 이 중 희망에 속지 않고 부조리 속에서 반항적으로 살아가는 길을 옹호했다.

메르소는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삶에 대한 헛된 희망을 버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그는 사형 집행에 대한 터무니없는 희망조차 버림으로써 오히려 해방감을 얻는다. 사제가 약속한 내세나 법이 강요하는 참회 대신, 눈앞의 별빛과 서늘한 밤공기 같은 현실 그 자체를 끌어안는다. 죽음 앞에서도 더는 도망치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르소는 오히려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고 카뮈는 말한다.

메르소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는 담담한 미소는, 삶이 얼마나 부조리하든 결국 자신만의 진실에 충실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평온을 상징하는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새로운 시선으로 읽는 《이방인》

《이방인》은 종종 불합리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진실에 충실한 한 인간의 이야기로 해석된다. 메르소는 사회의 눈으로 보면 이상하고 비정한 사람이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보면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솔직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 대부분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행하는 작은 거짓을 끝까지 거부했다. 카뮈 스스로도 메르소를 가리켜 영웅적인 것도 없이 진실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메르소는 단순히 냉소적이고 무감각한 인간이라기보다 무의미한 관습과 거짓된 위선에 반항한 아웃사이더로서 다가온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가면을 쓰지 않았고, 감정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았다.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진정성의 승리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일부는 메르소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의 냉담함과 무책임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메르소의 가장 큰 결함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비도덕성 그 자체”, 다시 말해 옳고 그름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결국 한 사람의 목숨을 앗은 뒤에도 충분히 참회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메르소는 히어로라기보다 인간 소외의 한 극단적인 예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카뮈는 독자가 메르소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그가 속한 세계 자체의 부조리를 보길 바랐던 듯하다.

메르소의 행동은 결국 그가 살던 무의미한 세계의 반영이다. 햇볕, 더위, 우연, 주변인의 부추김 등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이 겹쳐 일어난 살인극은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작품은 부조리한 삶에 대한 한 편의 우화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메르소라는 인물은, 우리 각자가 지닌 낯선 자아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가면과 역할을 벗겨냈을 때,
우리 내면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메르소는 어쩌면 그 껍질을 벗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 이 소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법 중 하나는 시대적·사회적 맥락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로, 당시 식민지 사회의 단면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메르소에게 총맞은 아랍인은 끝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그는 그저 아랍인으로만 불릴 뿐이다. 이 점은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토론거리가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카멜 다우드의 소설 『모르소, 반증 (The Meursault Investigation)』처럼 이 사건을 피해자 쪽 시선에서 다시 쓴 작품도 등장했다. 다우드는 이름 없던 아랍인에게 '무사(Musa)'라는 이름과 삶의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카뮈의 소설을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방인》이 지닌 또 다른 부조리, 식민지 현실과 타자에 대한 무관심를 부각시키며 원작을 새로운 빛 속에 비춰준다. 이렇듯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작품은 여러 갈래의 의미를 얻으며 재해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무게로 다가오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삶의 부조리와 인간의 진실일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편의 이야기적 대답이다. 메르소는 마지막에 처형대 앞에서 관중의 증오 어린 함성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유일한 응답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히 자신의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그는 세상에 어떠한 체념이나 원망 없이, 오히려 세상이 자기에게 무관심하듯 자신도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무관심을 보낸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자기 삶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이 역설적인 결말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는다.

《이방인》은 출간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독자들의 감정을 뒤흔들고 사유를 자극한다. 일상의 익숙한 껍질을 벗겨내고 보면 세상은 때때로 낯설고, 부조리하며, 때론 아무 의미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각자는 자기만의 진실로 살아간다. 메르소라는 한 남자의 특별할 것 없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과연 나는 얼마나 진실되게 살고 있는가?

내 감정과 행동은 사회의 기대에 맞춘 연기는 아닌가? 메르소의 삶과 죽음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문득 그러한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고전은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누구나 한 번쯤 세상에 대해 느꼈을 법한 부조리함, 그리고 그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카뮈의 이방인은 담담하면서도 강렬하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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