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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19세기 프랑스 문학 - 낭만주의, 리얼리즘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반항아,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by suis libris 2025.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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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스-카를 위스망스, Joris-Karl Huysmans
조리스-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

 

조리스-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 1848~1907)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연주의에서 데카당스(퇴폐주의)와 상징주의로 이어지는 문학적 흐름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848년 파리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네덜란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인 샤를-마리-조르주 위스망스(Charles-Marie-Georges Huysmans) 대신 더 네덜란드풍인 조리스-카를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20세에 프랑스 내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위스망스는 낮에는 관공서 직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작가로서 펜을 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그가 업무 시간과 관청 서류용지까지 활용해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관료 생활의 무료함을 문학으로 달랜 셈이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꿈과 현대성 사이, 휘스만스: 퇴폐의 미학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꿈과 현대성 사이, 휘스만스: 퇴폐의 미학

 

문단 데뷔 초반에 위스망스는 에밀 졸라를 필두로 한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 아래에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876년 첫 소설 『마르트(Marthe)』를 발표했고, 보불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 『등에 지고(Sac au dos)(1880)를 집필했고 졸라의 『메당 모임 단편집』에도 참여했다.

이렇듯 그의 초기 작품들은 현실을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었지만, 곧 그는 이 흐름에서 이탈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게 된다. 1882년 발표한 『낮은 곳으로(À vau-l’eau)』에서부터 위스망스는 성적 불운과 권태를 그리며 기존 자연주의와 결별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한 작품이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À rebours)』
『거꾸로(À rebours)』

 

퇴폐주의 문학의 선구자의 등장

1884년에 발표된 『거꾸로(À rebours)』(아 레부르, 거꾸로 혹은 반대로라는 의미로 영어 제목은 Against the Grain임)는 위스망스를 데카당스 문학의 기수로 만들어준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다운 줄거리는 없고, 주인공인 퇴폐적인 귀족 데제상트(Des Esseintes)가 세속 사회를 등지고 자기 취향대로 꾸민 은둔처에서 순수한 감각적 쾌락과 미학적 실험에 몰두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는 색채를 즐기기 위해 거북이 등껍질에 보석을 박아 장식하거나 희귀한 향료와 꽃들로 감각을 자극하는 기이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작품 노트, 출처:프랑스 국립도서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작품 노트

 

 

이러한 파격적인 내용과 문체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연주의 문학과의 결별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거꾸로』가 끼친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거스르는 퇴폐적 미학을 노골적으로 탐닉한 이 소설 아닌 소설에 대해 문단 원로 줄 바르베 도르비이(Barbey d’Aurevilly)는 이 작가가 언젠가는 권총의 총구 아니면 십자가의 발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극단적 탐미주의가 결국 작가를 절망에 이르게 하거나 아니면 신앙으로 이끌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거꾸로』 오디오북
『거꾸로』 오디오북

 

 

이러한 평가는 당시 『거꾸로』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위험천만한 작품으로 여겨졌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이 예언은 훗날 실제로 이루어졌는데, 위스망스는 문학적 퇴폐의 끝에서 종교로 방향을 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거꾸로』는 그 독특함으로 인해 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주인공을 타락시키는 노란 책의 모델로 위스망스의 『거꾸로』를 암시했고, 이로 인해 『거꾸로』는 독약 같은 프랑스 소설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위스망스의 실험정신은 이렇게 문학을 넘어 다른 예술 작품 속에서도 회자되며 데카당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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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Là-bas)』 초판본
『저 아래 (Là-bas)』 초판본

 

어둠과 악마주의

퇴폐적인 탐미주의의 정점을 찍은 후, 위스망스는 더욱 어둡고 심오한 주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891년에 발표된 『저 아래(Là-bas)(라-바, 저 밑에 혹은 지하에라는 뜻으로 영어 제목 Down There임)는 악마주의와 오컬트에 천착한 소설을 내놓았다.

이 작품에서 위스망스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탄숭배의 부활을 파헤치는데, 한편으로는 중세의 악명높은 인물인 질 드 레(길 드 레) 이야기를 병행하여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작품은 오컬트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현대의 퇴폐한 영혼들이 악마적인 것에 이끌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고, 중세 악마숭배자 이야기를 교차시킴으로써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간 영혼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 것이다.

 

 

『저 아래(Là-bas)』 표지
『저 아래 (Là-bas)』 표지

 

 

실제 『저 아래』의 주인공 뒤르탈(Durtal)은 사실상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는데, 위스망스의 이후 소설들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인물이다. 『저 아래』에서 뒤르탈은 현대 파리의 사탄숭배 현장을 탐색하며 정신적 공허와 환멸을 경험하게 된다.

위스망스는 이 소설을 통해 퇴폐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영적 공허와 악마적 유혹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만큼, 작품 출간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악마 숭배라는 선정적이고도 금기시된 주제를 다룬 덕분에 충격적이다는 평가와 함께, 한편으로는 이러한 어둠의 탐구가 과연 어디를 향해 나아가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함께 제기되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뒤르탈이라는 인물을 따라 전개될 위스망스의 다음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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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루트 (En route)』의 초판본
『앙 루트 (En route)』의 초판본

 

영적인 귀환

1890년대 중반, 위스망스의 삶과 작품 세계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맞이하게 된다. 바로 가톨릭 신앙으로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사실 바르베 도르비이가 던졌던 예언처럼, 퇴폐의 나락을 탐험한 위스망스는 결국 신앙의 품에 안기게 된 결구를 낳았다.

그의 삶은 1892년 전후로 가톨릭적 신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적 변화는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1895년에 발표된 『앙 루트(En route)(앙 루트, 길 위에서라는 뜻)는 앞서 등장한 뒤르탈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가 자신의 영적 체험과 회심 과정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뒤르탈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의 영적 피정(避靜)을 통해 심신의 시련과 구도의 길을 겪게 된다. 이는 곧 위스망스 본인의 가톨릭 신앙 회복 여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퇴폐와 악마에 매료되었던 영혼이 고행과 성찰을 거쳐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 작품은, 출간 당시 문단에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퇴폐문학의 기수가 성자가 된 듯한 변화였기 때문이다.

 

 

『앙 루트 (En route)』 표지, 고민하는 위스망스

 

 

위스망스는 이후에도 신앙과 예술을 결합한 작품들을 이어갔다. 1898년작 『대성당(La Cathédrale)』은 샤르트르 대성당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와 상징 해석을 담은 작품으로, 거기에 약간의 줄거리를 더해놓은 형태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거대한 고딕 성당을 배경으로 신앙심과 예술 혼을 동시에 탐구하는 작품이다. 위스망스의 문체가 자연주의적 세부묘사와 상징주의적 영성을 아름답게 융합하고 있는 대표작으로 분리된다.

1903년에는 『봉헌자(L'oblat)』(롭블라, 오블라투스 혹은 봉헌자)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실제 그가 지냈던 리귀제(Ligugé) 수도원의 생활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위스망스 자신도 해당 수도원의 오블라투스(수도원에 소속된 평신도)로서 1899~1901년을 보낼 정도로 신앙 생활에 깊이 매진하기도 했다.

 

 

공쿠르 아카데미에 참석한 위스망스
공쿠르 아카데미에 참석한 위스망스

 

 

말년의 위스망스는 문학적 영광과 더불어 신앙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병행했다. 그는 예술 평론가로서도 안목이 뛰어나 인상파 화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주관하는 공쿠르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그의 말년은 예술가적 거장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1907년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며 품위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영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의 쾌락과 예술의 탐미에서 시작하여, 악마적 어둠을 거쳐, 마침내 신의 빛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위스망스 자신의 삶과 작품에 공통으로 흐르는 서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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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당스
데카당스

 

그가 남긴 것들

위스망스의 작품과 행보는 당대 데카당스 문학(decadent literature)과 상징주의(symbolism)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거꾸로』의 출현은 퇴폐주의 문학의 선언문과도 같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연주의의 사실적인 묘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술지상주의와 탐미주의로 기울어진 이 소설은, 이후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현실보다는 주관적 내면과 미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을 추구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시인들이 이끌던 상징주의는 주로 시 분야에서 전개되었지만, 위스망스의 산문은 시 못지않게 감각적 이미지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보여주었다. 『거꾸로』에서 식물, 보석, 향기, 색채 등에 대한 집요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는 사물에 내재한 상징적 분위기를 이끌어내며 독자들을 현실 너머의 느낌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기법은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하던 '보이는 현실 뒤에 숨은 진실'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구현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위스망스는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같은 시인들과는 비슷한 맥락적 연관성을 보인다. 문학에 있어서의 감각의 해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징주의

 

 

또한 위스망스의 데카당스 미학은 이후 예술계 전반에 흔적을 남겼다. 그의 영향으로 문학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풍조가 힘을 얻었고, 회화와 음악 등 다른 예술 영역에서도 퇴폐미와 몽환적 분위기를 추구하는 실험들이 뒤따랐다.

위스망스는 자연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선 작가로서 문학 사조의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쪽 발은 사실주의적 관찰에, 다른 발은 상징과 영적 탐구에 담그고 있었던 그의 작품들은 데카당스 문학의 정점을 보여줌과 동시에 상징주의 문학이 나아갈 길을 예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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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에 남긴 유산

위스망스가 남긴 유산은 20세기 이후 현대 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자전적이고도 실험적인 서사 방식은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와 영적 방황을 깊이 파고드는 그의 작품들은 현대 문학의 중요한 주제인 자아 탐구와 구원의 모티프를 선구적으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삶과 작품은 극단으로 질주한 한 문학인의 초상이라 할 만한다. 그는 세기말(fin de siècle)이라고 불린 시대 풍조 속에서 예술과 인생의 극단을 모두 체험했기 때문이다. 관능과 탐미의 극치를 묘사한 뒤 다시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길을 선택한 그의 행보는, 마치 한 인간 안에 여러 시대와 사조가 응축된 듯한 인상을 준다. 자연주의자에서 데카당스로, 다시 경건한 가톨릭 신자로 변모한 그의 인생 역정은 문학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일 것이다.

그의 독특한(?) 행보 덕분에 우리는 퇴폐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황홀경을 모두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작품들을 얻게 되었다. 그는 현실을 등지고 환상에 침잠하는 것이 구원이냐고 질문한다. 어쩌면 그 끝에서 마주친 공허를 통해 새로운 빛을 찾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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