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시대를 살면서도, 한 남자는 붓 대신 정을 들고,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 채 자신의 모든 시간을 단 한 사람에게 바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소설 《그녀를 지키다(Veiller sur elle)》는 거대한 전쟁도, 화려한 반전도 없지만 한 문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를 깊이 가라앉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켜낸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작품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해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줄거리 요약
소설은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한 수도원의 병실에서 시작된다.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비탈리. 그의 곁에는 말없이 앉아 있는 수녀들이 있고, 언젠가부터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무도 그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기억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켈란젤로는 고아였다. 성당의 돌바닥을 닦으며 자란 아이는 조각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돌을 손에 쥐면 형태가 보였고, 정과 망치가 손에 익숙했다. 그렇게 수도사들 사이에서 자라던 소년은 우연한 계기로 오르시니 가문의 저택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난다.
비올라. 귀족 가문의 딸로, 전통과 권위, 규범 속에 갇힌 듯한 삶을 사는 그녀는, 겉보기와는 달리 자유롭고 반항적인 내면을 지니고 있다. 비올라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처음 본 순간 그 안에 잠든 힘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인 첫 번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시대는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파시즘이 득세하고, 예술은 정치의 도구가 되며, 비올라는 강제로 정략결혼의 제물로 선택된다. 미켈란젤로는 오르시니 가문을 떠나 피렌체로 향하고, 조각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언제나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의 돌은 언제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전쟁은 수많은 것을 무너뜨린다. 비올라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자 사회운동에 가담하고, 미켈란젤로는 수감과 망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과 신념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들은 몇 번의 재회를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함께하지 못한다. 시대는 그들을 계속 갈라놓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수도원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 그녀의 조각상은 완성되었고, 수도원의 정원 한복판에 서 있다. 아무도 그 조각상의 진짜 주인을 알지 못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평생을 걸쳐 완성한 사랑, 그 끝에 남은 단 하나의 형상이 바로 그녀였다는 것을.
비선형적 서사
소설은 전통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는 병상에 누운 노인, 미켈란젤로의 현재에서 시작되지만, 곧 그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이끌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기억들을 직선적으로 나열하지 않는 대신 시간은 마치 조각가의 손에 쥐어진 거친 돌처럼 깎이고, 이어 붙여지고, 다시 떨어져 나가며 서서히 인물들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미켈란젤로의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는 지금의 정적 속에서도 어린 시절의 냄새, 비올라의 웃음소리, 조각 작업을 하던 손의 떨림을 생생히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의 파편들을 따라가며 하나의 인물, 하나의 사랑, 하나의 삶을 조각처럼 완성해 간다. 시간의 비약은 단지 구조적 장치가 아니라, 이 소설이 품고 있는 정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지킨다’는 행위는 늘 현재가 아닌, 과거로부터 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확실하지 않고, 때로는 왜곡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 불완전한 기억들이 인물의 진심을 드러낸다. 미켈란젤로는 단 한 번도 직접적인 고백을 하지 않지만, 그가 떠올리는 장면들—그녀가 나지막이 건넨 말, 어깨 너머로 스친 손끝, 완성되지 못한 조각의 곡선—은 그 어떤 언어보다도 강렬한 사랑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파편화된 서사는 비올라의 삶을 더욱 신비롭고도 안타깝게 만든다. 그녀는 소설 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녀를 본다. 그렇기에 그녀는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 삶과 예술, 자유와 저항, 그리고 사랑이 응축된 상징에 가깝다.
결국, 장바티스트 앙드레아는 이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한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억은 조각과도 같다. 무언가를 지우고, 덜어내고, 깎아낸 끝에야 진짜 형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인생이야말로, 그 조각의 완성인 것이다.
지킨다는 것의 진짜 의미
소설의 마지막에서 미켈란젤로 비탈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켜왔는지를 마침내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수도원의 병상에서 말없이 누워 있는 노인에게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그는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고요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한 사람을 향한 생의 모든 무게를 품은 고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평생 동안 지킨 건 단순한 사랑의 기억만이 아니다. 그것은 비올라라는 한 인간의 존엄, 자유, 존재 자체였다. 시대는 그녀를 침묵시키려 했고, 가족은 그녀를 통제하려 했으며, 권력은 그녀의 삶을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녀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지켰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의 자리를 지워지지 않게 만들며, 그녀의 존재를 예술 속에 새겼다.
수도원 정원 한복판에 세워진 조각상은 말한다. 그 어떤 무력한 시대도, 그 어떤 정치적 억압도, 어떤 이별도, 사랑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고. 이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작품이자 유일한 고백이며,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다.
소설의 제목 《그녀를 지키다》는 처음엔 사랑하는 여인을 지킨다는 낭만적 표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 그 말의 무게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가온다. 지킨다는 것은 곁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견디고,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며, 끝내 말없이 기다리는 것. 그 모든 고요한 행위가 결국 지킴이라는 단어 안에 녹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고, 동시에 지킴이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도 말했고, 손을 뻗지 않고도 안았으며,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한 흔적을 남겼다. 소설은 그가 살아낸 이 조용한 위대함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천천히 새겨 넣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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