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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소설 '9번의 일' 리뷰

by suis libris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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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능력주의적 사고에 심취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환경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업무에 관한 지식이나 전문성을 키우고 자리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에게 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들을 속으로는 골칫거리 정도로 여기는 거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미 철 지난 지식으로 자리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어르신들도 나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고과 철마나 생명 연장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다 할 것처럼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보면 동맥경화에 걸릴 것 같이 답답했다.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비워줘야 새로운 이들에게 기회가 생길 텐데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에 선순환의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반감이 생길 때도 있었다. 젊은 신입 사원의 눈에는 그들의 고충보다는 나와 비슷한 또래들의 안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내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회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소설 한 권을 읽었다면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해진 작가 《9번의 일》

 

 

김해진 작가의 《9번의 일》은 저성과자로 분류된 이의 추락하는 삶을 그린다. 버텨야 한다는 일념 하에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잔인하고 씁쓸하다. 통신회사 현장 팀에서 26년을 근속한 그는 저성과자로 낙인이 찍힌 후 수모를 겪는다. 일단 어느 기업에서든지 불필요 인력으로 분류되는 순간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수모를 견디어내야 한다.  동료들과의 시선, 재교육, 적법한 불합리 등 자존심과 체면과 개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과정은 가혹하다. 대출금, 연금, 생활비, 교육비 등등 한 가정의 가장이 선택한 삶은 일을 위해 인간성을 버리는 일이었다.

 

 

 

 

 

사회적인 문제를 주제로 다룬 소설답게 소설 중간중간의 구절을 뽑아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지만 이미 몰락해버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깊이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끓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걸지도 몰랐다.

 

김해진 《9번의 일》

 

 

 

일이 곧 삶의 전부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은 없었을까. 버티는 것 이외에 어떤 변화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문구를 보면서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잣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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