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삶을 위한 게으름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 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일에 매어 생활했다. 일 중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생활은 이미 일(학생 때는 공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기 싫고, 지겹고, 지긋지긋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다가도, 하루를 알차고 성실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뿌듯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중독 증상이 꼭 생활이 피폐해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중독이 반드시 절제할 수 없을 만큼 (게임이나 도박, 음주와 같은)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만하고 싶지만 그만둘 수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정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괴롭고 힘들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중독의 한 증상이 될 수 있다.
일에 치우친 생활 패턴으로 일 이외의 다른 부분은 결핍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할 무렵부터 일을 줄이려 시도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 생활 방식을 고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일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으로 나는 ‘게으름’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도 있었다. 일 대신 다른 유희를 일하는 시간에 끼워 넣으려고 다른 계획을 빼곡하게 짜기도 했다.
게으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게으름에 관한 책들을 여럿 접해봤지만, 이번만큼 흥미로운 책은 처음이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답게 그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에세이 형식을 하고 있지만, 철학서의 느낌이 짙은 책이다.
책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꼭지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다. 노동 시간과 여가, 노동자들의 삶의 질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노동 이야기를 하면서 근면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근면 성실이 언제부터 미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새마을 운동이 있기 훨씬 전부터 근로에 대한 찬양이 있었던 것 같다. 책에서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을 시키는 사람과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보수, 더 높은 지위와 더불어 일을 하게끔 하기 위해 생겨난 케케묵은 상호 합의로 만들어진 암묵적인 약속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그 약속이 믿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겐 언제다 충격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 시간이 15시간이었다. 아이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고 어른만큼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 시간이 약간 긴 것 같다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제넘게 제의했을 때 되돌아온 대답은, 일이 어른들에겐 술을 덜 먹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 근로자들이 막 투표권을 따낸 직후였는데 몇몇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에서 대단히 분개했다. 나는 한 늙은 공작부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
책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일을 했는지 보면서 다소 충격적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정보이긴 했지만, 일을 시키는 입장에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자극적이었다. 임금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혹은 그만한 재력이 된다고, 부리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막 대하는 가족의 일화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하루 평균 15시간씩 일을 했고, 아이들은 12시간씩 일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도 일주일에 근무 시간을 정해놓는다고, 20년 동안 최저 임금을 주면서 함께 일하던 직원을 해고했다는 사회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200년이 넘게 지났지만 얼마 전까지 제법 많은 곳에서 과거와 비슷한 수준의 노동 강도를 보였다. 그나마 법적 규제가 생겼지만, 아직도 하루에 약 10시간은 합법적으로 일을 하거나 시킬 수 있다.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곳들이 있고, 아직도 많은 일터에서 그 이상을 일하는 시간에 쏟아부어야 계획한 일정을 맞출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근면과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한평생 일에 대한 보람과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발전을 이룩하는데 혁혁한 역할을 해주신 앞선 세대들의 노고를 나는 찬양한다. 그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고, 충분히 존중되고,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근면이라는 환상이 남긴 사회적 폐해는 고스란히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만성 피로, 신경쇠약, 소화불량, 원인 모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고, 커피 같은 각성제가 없으면 하루를 버틸 수 없을 만큼 피로한 사회가 되었다. 단연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사회문제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의 원인이 일에 대한 집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겠지만, 지나치게 성실한 근로와 효율성과 경쟁에 집중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중략)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을 적게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상황이 나아질까? 다른 국가, 일명 복지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몇몇 나라에서 시험적으로 시행되는 사례들을 보면 근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긍정적이지만도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를 높일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먹고 살아가는 걱정에서 벗어나 삶의 여가를 허락할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된다. 많은 사람은 공리주의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누구를 희생할 것인가? 더욱이 모든 사람의 행복의 정도는 모두 같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러셀의 말처럼 노동 시간을 줄이고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 동안 1퍼센트의 사람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책에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에 대한 그의 견해, 청년들이 보이는 냉소주의에 대한 글, 아이들 교육의 중요성과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사회적 주제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파시즘, 금욕주의, 영혼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내용도 제법 흥미롭다.
글을 통해서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책의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다. 이번 책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즐거움,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불균형, 그리고 그 불균형을 해소하고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따뜻한 조언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회를 문제 투성이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책으로 읽어 내려가기에는 쉽지 않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지만, 사회 비평가답게 문제를 바라보는 온화함이 느껴진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비교적 객관성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모습에서 대부분의 주장이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 읽혀 내려간다. 이미 반세기도 전의 생각들이지만 그의 통찰력은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유효한 듯 보인다.
어떤 종류의 게으름인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지닌 명백한 유토피아적 성격은 일부에 의해 중대한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을 삭감하지 않고 어떻게 하루 4시간 노동을 이뤄낼 수 있는가? 이것은 보편적인 게으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수조건으로서 그렇게 하자고 선동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러셀의 주장하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러셀은 노동을 더 이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세상이 보다 행복한 세상일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신기술이 약속한 게으름의 증대가 실제로 실현된 좀 더 여유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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