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에세이라는 장르를 편독했던 시절 나는 책으로 사람, 콕 짚어 말하면 책의 저자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 한껏 심취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 너머 그/녀와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모든 종류의 글이 똑같겠지만 에세이는 특유의 멋이 있었다. 작가의 일기장 같기도 했고, 이따금씩 낙서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순간 느낀 감정과 생각을 몇 페이지로 되살려냈고,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 일을 겪은 주인공의 생각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지 궁금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그 궁금증을 에세이로 풀었다.
오랜만에 내가 에세이를 즐겨 읽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책장을 덮고 겉면에 쓰인 그녀의 이름을 보는데, 마치 작가 캐럴라인 냅과 내가 제법 친한 친구가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금발인지, 쌍꺼풀은 있는지, 키는 큰지, 코는 오똑한지 모르지만, 그녀의 평소 생활, 성격, 가치관, 술을 마실 때 습관, 남을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알 것만 같았다.
나도 은둔자의 색을 입고 있기 때문일까?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도 명랑한 은둔자일지도 모른다.
매일 술에 취해 생활하던 캐럴라인은 과거 경험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해외에 머물던 시절 나는 쉘터shelter라고 불리는 곳에서의 한 달. 쉘터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숙박시설로 사회 보장금의 일부를 집세로 내고 오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곳이다. 그곳에는 대부분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 머물렀는데, 알코올 중독자였거나,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 평생 제대로 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주로 머물렀다. 모두 월세도 낼 수 없을 만큼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밤에는 이따금씩 경찰이 들이닥쳤는데,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이들이 음주나 마약 하는 사실이 발각되면, 즉시 퇴소 조치가 이루어졌다. 일명 재활 치료소(?) 같은 곳에서 나는 이웃(?)들과 제법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도 금주 첫해에 간간이 그런 기분이 들었으나, 그러다가도 에드워드와 식사했을 때와 같은 순간들을 주기적으로 접하면서 그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불안이 다가오면, 당신은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슬픔이 밀려오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분노나 자기 의심이나 자기 혐오가 일어나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이것은 자명하고 불가피한 이치다.
내가 캐롤라인에게 쉘터의 냄새를 맡은 이유는 술기운에 의지해 현실을 이겨내려는 모습을 진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술을 즐긴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술이라도 없으면 현실이 슬퍼서 그리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그녀의 삶을 보았다.
20년을 넘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왔던 그녀의 커리어답게, 고독, 중독, 상실, 이별, 우정이라는 주제를 쉽고 솔직하게 글로 풀어놓았다. 내면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쓰인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 - 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 - 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가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TV 등장인물들을 현실의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고, 집에 들어온 파리가 친구 삼을 만한 상대로 느껴지고, 남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작은 사건들이(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추리닝 바지보다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기이하고 불가해한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특히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은둔자로서 고립과 고독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내용이었다. 혼자가 편하지만 혼자는 외롭고, 고독을 즐기지만 아무도 없는 고립의 시간을 경계하려는 이중적인 심리 상태는 일상 거의 대부분을 혼자 보내는 지금의 나와 무척이나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많이 바랐던 것일까? 그때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엘리자처럼 나도 관계에서 오는 속상함은 내 탓이겠지, 내가 어떻게든 바뀌면 만족할 수 있겠지, 내가 덜 요구하고 덜 바라는 사람으로 변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데는 긴 시간이 - 몇 년이 - 걸렸는데, 그것은 내 욕구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내가 그토록 깊은 수준의 친밀감과 사랑을 원하는 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내가 불만스러운 것은 솔직히 말해서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다.
사랑받는 느낌이란 - 진정으로 사랑받는 느낌이란 - 일종의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느낌은 상대와 내게서 절반씩 생겨나야 한다. 사랑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인 감정이다. 가끔 밀려드는 의문과 실망과 애매함의 파도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물결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그 일부다.
이런 깨달음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나도 이런 현실이 싫고 그래서 자주 맞서려고 한다. 아직도 나는 동화적인 환상,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새겨온 신념, 즉 언젠가 완벽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사로잡아 모든 것이 분명하고 밝고 모호함 따위는 없는 미래로 데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끔찍이 어렵다. 하지만 나도 인간일 뿐인 것을 어쩌겠는가. 나는 사랑받고 싶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이들에겐 늘 혼자라는 원인 모를 불안함이 있다. 그런 불안감을 굳이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걸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느긋하지만, 이따금씩 스며 들어오는 그 고독함은 익숙해져야 할 존재다. 그런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낸 솔직한 에세이 한 권을 만나다니 이번 주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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