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다. 좁고 꼬불꼬불한 차도, 울퉁불퉁한 인도, 사람을 기다리고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광장, 낡은 건물과 가스등 모양을 한 거리의 가로등까지 옛 풍경이 그대로다. 도시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다.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유럽의 일부 도시들은 몇백 년, 혹은 그 이상 현재와 같은 도심으로써의 기능과 지위를 지켜오고 있다. 나는 이방인이 되어 도시를 여행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느껴보려 애써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차도 위를 달리는 전기 자동차와 낡은 건물에 들어선 익숙한 햄버거 가게들 뿐이다.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기억을 떠올리면 이런 이색적인 풍경이 되살아난다. 초가집 대청마루에 60인치 TV가 놓여 있는 듯 동떨어진 느낌이다. 이제는 구들장에 불을 피우는 일은 없지만, 돌침대에 솜이불을 펴고 자는 나와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하루는 아주 오래된 집에서 게 되었다. 도심에서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고, 낡고 오래된 숙소였지만 저렴한 가격이 나를 잡아당겼다. 집 앞에서 동양 여행객을 맞아주시는 주인아저씨는 300년도 넘은 집이라고 웃으며 소개했다. 그렇게나 오래된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니 걱정보다 호기심이 생겨났다. 아저씨는 앞장서서 하룻밤을 보낼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밖에는 아직 해가 떠 있었지만 방안은 어두웠다. 창문은 작았고, 창들은 낡았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방 한쪽에 위치한 전구가 방 내부를 비춰주는 거의 유일한 빛이었다. 침대도, 책상도, 의자도, 옷장도 모두 손때가 묻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물건들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무척 오래된 것들임에는 틀림없었다.
방에 짐을 풀고 삐그덕 소리를 내는 침대에 누웠다. 나는 갑자기 '지금은 비어 있는 방의 주인은 누구였을까?’하는 쓸데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300년도 넘은 이 공간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이제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혹시 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도 있었을까? 요즘같이 한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3명은 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태어났을 테고, 떠나갔을 테고, 다시 돌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 특수청소부라는 직업으로 죽은 이들의 흔적을 지우는 그의 에세이를 읽고는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은 과거 유럽의 오래된 집에서 보낸 하룻밤이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비참한 혹은 슬픈, 안타까운 마지막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여행객의 차지가 되었을 침대의 주인도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집을 처음 지었던 안주인은 이미 백골이 되고도 남았을 만큼 사연이 많은 집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왠지 집안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들이 시들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케이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특수청소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고독사, 자살,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무덤덤하게 털어놓은 일화가 무겁게 와 닿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수개월을 방치한 청소년 아들, 아이를 살해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돈 되는 것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린 집을 청소하며 느끼는 회의감이 이 책과 일맥상통한다.
책에는 보다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나치게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으려는 노력이 군데군데 느껴진다. 그중에 고양이 똥을 치우는 관직 (중국에서는 고양이 잡사를 찬스관铲屎官chăn shĭ guān, '똥을 치우는 관리'라고 부름)을 제법 오래 역임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려묘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화가 눈에 띈다. 작가 자신도 한 고양이의 집사로서 뼈밖에 남지 않은 작은 새끼 고양이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그르렁 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고양이와의 이별을 떠올린다. 나도 갑자기 얼마 전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10년을 함께한 고양이의 사진을 찾아본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별로 없어 아쉽다. 이제 와서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제는 새로 찍을 수 없으니 몇 장 안 되는 사진과 그 녀석의 추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작년 이맘때는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꽂이에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와 같이 죽음에 관련된 책이 제법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는 읽겠다고 마음먹고 들춰보지 않은 단테의 신곡도 보인다. 나는 왜 죽음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읽고 있을까? 누군가와의 이별이 두렵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자기 죽음이 두렵기 때문일까? 허락된 시간만큼은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날들을 돌아본다. 언젠가 더는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에 더 열정적이었고, 더 열심히였다. 내가 죽음을 끊임없이 가까이 두고 있는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만들어 본다. 조금 돌아갈 수 있지만 후회는 남겨두지 않고, 게으를 수 있지만 낭비하지 않기 위한 채찍질일지도 모른다.
죽음과 가까이 있는 이들을 본다. 투병 일기를 보고, 과거 상처를 받고 자살 충동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이들을 보고, 무연고 시신을 처리하는 공무원의 일상을 그림 영화를 본다. 수십만 시신이 묻혀 있는 카타콤catacomb은 세계인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고, 빈센트 반 고흐가 묻혀 있는 무덤 주변은 공원이 되었다. 그들이 상처를 말하고, 그들의 사연을 듣고, 죽음과 직면한 일상을 공유받으며 심정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삶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하루도 눈을 뜰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를 더 보낼 수 있음에 기뻐한다. 오히려 더 깊은 희망을 본다. 그들의 구독자가 수만, 수십만 인 걸 보면, 아마도 희망을 보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 하지만 죽음 곁에는 항상 삶이 존재한다. 누구나 언젠가 생을 끝마치게 되지만 끝이 있기에 더 값지고, 깨지기 쉽기에 더 소중하다. 그 소중한 인생을 어떡하면 더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삶이라는 긴 문장은 죽음이라는 마침표로 완성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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