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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에세이

나해석님의 에세이 '꽃의 파리행' 리뷰

by suis libris 202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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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도시, 프랑스 파리. 100년 전 파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100년 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사진을 보면 사진 속 에펠탑의 전경은 지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몰라보게 바뀌었고, 추억 속 장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도시가 있다면 그곳은 왠지 파리가 될 것 같다.

 

파리에 관한 책들은 수없이 많다. 파리를 여행한 책이라면 더욱 다양하다. 파리는 그 역사만큼이나 방대하고 다양한 문헌이 존재할만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중에 100년 전 여성의 신분으로 파리를 다녀온 여행기가 있다면 어떨까? 일제 강점기에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한 여성 화가의 세계 여행기가 눈길을 끌었다.

 

 

 

꽃의 파리행

 

 

 

《꽃의 파리행》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 독립운동가 나혜석의 구미유람기를 모은 책이다. 약 1년 8개월 동안 경성, 하얼빈, 모스크바, 파리, 브뤼셀, 베를린, 런던, 뉴욕 등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한다. 조선 여인의 눈으로, 화가이자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본 20세기 초 서구 도시들의 모습이 잘 기술되어 있다. 더욱이 조선 여인으로서의 철학,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고뇌, 조선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8개월간의 파리 생활을 하면서 남긴 길지 않은 글이 눈길을 끈다.

 

 

드디어 파리

파리라면 누구든지 화려한 곳으로 연상한다. 그러나 파리에 처음 도착하면 누구든지 예상 밖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공기가 어두침침한 것과 여자의 의복이 검은색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볼 때 첫인상은 화려하지 않았다. 사실은 오래오래 두고 보아야 화려한 파리를 조금씩 알 수 있다.

 

 

도로의 설비

파리는 에투왈을 중심으로 별과 같이 길이 뻗어 있다. 그리고 건물이 삼각형으로 되어 자못 아름답다. 길모퉁이 집 벽에는 반드시 동리 지명이 쓰여 있어 길 찾기는 쉬우나 누구나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방향이 전혀 달라진다. 어디를 가든지 도로 좌우편에는 가로수가 있고 중앙 차도는 목침만 한 나무가 모양 있게 깔려 있다. 도로 좌우에 인도가 있고 거기에는 매 칸에 하나씩 수도가 있어 아침마다 물을 뽑아 길을 씻어내려 유리같이 되어 있다. 중앙에는 반드시 역사적 인물의 동상, 금상, 혹은 신상 분수가 있어 중심점을 취한 것이 그림의 구도와 같다.

 

 

다방

파리 시내에는 한 집 건너 카페가 있다. 피곤한 몸을 쉬일 때, 머리를 쉬일 때, 이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을 따라 놓고 반나절이라도 소일할 수 있으니 혹 밀회 장소로도 이용하고 책을 읽거나 편지를쓰거나 친구와 이야기하거나 사교 장소처럼 되어 있다.

일반 유럽인의 성격은 활동적이어서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또 곁에 사람 없이는 못 견뎌 한다. 파리에서 제일 큰 다방은 라꾸불 카페와 카페 톰이 있으니 밤에 가보면 인종 전람회와 같이 모여들어 장관이며 카페 톰은 화가가 많은 몽마르트르에 있어 늘 만원이다.

 

 

 

 

나혜석

 

 

나혜석 작가는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18년 미술교사로 일을 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20년 김우영과의 결혼 후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한 것으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나혜석은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당시 여성의 신분으로 여행은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여성이 남긴 여행기라면 더더욱 드문 일임이 분명하다.

 

 

1900년대 파리의 모습

 

 

 

여행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개인이 여행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영감을 받기도, 그래서 삶을 바꿔 놓기도 한다. 한 권의 책만큼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거라 생각한다.

 

그녀에게도 똑같았으리라 생각한다. 구미 유람을 통해 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고, 다름을 사고하고 체득함으로써 한층 발전된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 같다. 여행기 마지막에 남겨진 그녀의 고민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순탄치 않았던 그녀의 삶도 이를 방증하는 듯싶다.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을 겪고 돌아온 그녀에게 당시 조선 여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쩌면 1년 8개월의 여행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립다.

내게 큰 병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친화하지 않는 재주다. 나는 이 재주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나 내게는 있지 않다. 나는 이러한 나를 퍽 미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나 배냇병신인데 어찌하랴. 이는 보는 것, 듣는 것, 배우는 것을 내게 친화하려는 고집이 있는 까닭이다. 즉 내 것을 만든 후에 유쾌함을 느끼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무엇이든 의미를 붙여 즐겨서 하는 것이 되어야 속이 시원한 이상한 심사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까지 조선 대중의 생활로 들어서려면 농촌 생활부터 살아볼 필요가 절실히 있었다. 내게 농촌 생활이 얼마나 필요하였는지.

 

 

 

색다른 시선, 색다른 경험, 색다른 여행기를 찾는다면, 나혜석의 《꽃의 파리행》도 충분히 그 갈증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 장의 사진이 한편의 글을 대신할 만큼 강렬한 메시지를 담기도 하지만, 한 편의 글은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감정과 고뇌와 사고를 명확하데 담는다. 기록이라는 것은 이래서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100년 전 여행을 다시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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