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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에세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리뷰

by suis libris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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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후에 나름 눈으로 먹고 속으로 씹고 삼킨 감상들을 뱉어내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반대로 글들을 조용히 체화하고픈 책이 있다. 어쩌면 체화해야 하는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로 더 잘 알려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단순히 책이 역사적  오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말을 잊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앞 장으로 돌아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배경지식을 요하는 문장들로 도배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아픔을 말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유대인 학살자를 유대인의 법정에 세움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던 2년간의 행적이 충분히 만족할 만큼 폭넓게 논의되고 인류가 고심해 봐야 할 문제를 다루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인류를 감싸고 있는 큰 굴레에 질문을 던지는 책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파도들은 신발이 젖을까, 바지를 버릴까 재빨리 몸을 움직여 파도를 피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거대한 큰 파도 앞에서는 밀려오는 파도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파도가 밀려와 나를 덮쳐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한 가지 희망을 품는다면, 거대한 파도를 겪고 나서도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정도다. 어떠한 의미로든 독자를 압도하는 책 앞에서는 쉽게 입을 뗄 수가 없다. 글을 품은 내 안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감정을 꺼내놓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누구나 알고 있는 2차 세계 대전은 수백 가지 시선으로 해석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해야 할 말들이 많다. 그중에 나치와 유대인 학살을 빼놓을 수 논할 수 있는 주제는 없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학살'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만큼 끔찍하고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제법 있지만, 유대인의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었고 광범위했다. 그 차가운 절차와 체계적인 시스템 때문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총과 칼, 폭력과 무력으로는 불가능한 수치다.

 

 

 

법정에서 증언하는 아돌프 아이히만

 

 

 

그 효과적인 인류 학살 시스템을 직접 만든이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를 평가해야 할까? 반인류적인 행위를 저지를 전범이라는 판결만으로 충분할까? 그 대상이 적, 즉 우리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직업이었던 군인이라면? 더욱이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시 중이었다면? 전쟁과는 무관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정도로 이해해야 할까? 상부 명령에 따른 작전이었다면 반유대주의 정책은 정당화할 수 있을까? 단순히 패전국에 대한 더욱 잔혹한 복수였을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가 승전국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비록 반세기도 더 지난 뒤에 승전국의 지도자가 공식적인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비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이유로 해서 아이히만을 처벌한다면, ... 이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가 논고 서두에 내뱉은 이 주목할 만한 말은 분명 이번 기소에서 핵심 문장임이 입증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송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처럼 전쟁이라는 특수하고 결코 간단치 않은 시대적 배경 앞에서 재판은 이 모든 물음에 답할 만큼 성숙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가족과 형제를 죽이고, 자신이 속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존재를 말살을 주도했던 이를 앞에 두고 이성적으로 이런 거대한 질문들의 답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착각이 있었다면 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당시에는 나치 전범자들에 대한 처형(?)이 사회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시대였다. 체포나 법적인 절차 없이 길거리에서 총살하거나 더 잔인한 방법으로 살육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장교들의 재판도 있기는 했지만, 그 재판으로 정의가 세워졌다고 기억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패잔병들에 대한 처형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행위에 더 가깝다. 물론 재판이라는 법치주의 절차에 따라 시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의 구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재판의 중심에는 행위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행위자는 연극의 주인공과 같다. 따라서 만일 그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지, 그의 행위가 야기한 타인의 고통 때문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을 재판장은 가장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방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자주 실패한 것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피고 측의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히틀러와 열광하는 시민들

 

 

 

잔인하고도 반인류적인 범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복종과 순응이라는 사회적 프레임이 기저에 깔려 있다.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시스템, 이의를 달거나 거부할 수 없는, 혹시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를 바로 잡는 데도 피의 대가가 들었을 것이다. 책과는 별개의 내용이겠지만 최악의 사태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되돌리려는 노력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거대한 굴레 앞에서 그 시도들은 폭풍우 속 촛불처럼 금세 꺼져 흔적도 사라졌다. 이미 기울어진 건물은 쓰러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까?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하고, 배가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나야만 경각심을 느끼는 것은 아닐 텐데, 누구도 잘못됐다 말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초등학교 학급에서도 친구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애들은 왕따가 되는 시대에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으면 모른 채 하는 무관심에도 양심이 발동해야 한다. 더욱이 쓰러진 건물 잔해 앞에서 이 사고가 누구의 잘못인지,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모든 사고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시도로는 어떠한 문제도 발본색원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없다. 흉악한 지도자, 히틀러 한 사람 때문에 극악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넘어가는 게 편리해 보일 수는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과연 한 사람이 범국가적인 살생을 감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S와 M이 만났을 때 그 강렬함이 배가 되듯, 폭력적인 복종과 처절한 순응이 만나 폭발했을 때 비극이 탄생한다. 몇 사람의 가해자만으로 악이 실현될 수 없고, 그 몇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악의 원흉을 처단했으니 과거는 과거에 묻어버리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는 말도 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실수를 대면하지 않고는 어떻게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말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는 한치의 발전도 없다.

 

 

 

이스라엘 영웅주의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하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 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복종적 순응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지적처럼 보였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검사는 증인들마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 5000명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이 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슬픈 진실은 초점이 잘못 잡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비유대인 집단이나 민족들도 이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회적 요인과 환경적 특수성, 전시 중이라는 사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반인류적인 학살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고, 또 발전시킨 최악의 노력에 박수를 보낼 수는 없다. 어떠한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와도 아이히만의 행적은 정당화될 수도, 포장될 수도 없다. 그러한 면에서 아이히만은 오점을 순화하지도, 그렇다고 왜곡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법정 변론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그가 정리하고 써 내려가고 대답하고 주장한 반론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예전 어느 토크쇼에 나온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그럴듯한 포장지로 포장을 했어도 그 안에 든 게 오물이면 오물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과거 행적에 대한 오점에 대한 구린내는 아무리 잘 포장하려 해도 감출 수 없다. 그 대상이 한 국가의 지도자일지라도.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질문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이히만이 이 일에 대해 마지막 진술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반복했다. "그 누구도 제게 와서 제가 의무를 수행하면서 한 어떤 일에 대해서 저를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뤼버 감독조차도 그렇게 했다고 주장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제게 와서 고통을 줄일 방도를 찾았습니다만 실제로 제가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뤼버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추구한 것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나치스가 인정한 기존의 범주들에 따라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범주들은 애초부터 독일계 유대인에 의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특권적 범주(폴란드계 유대인과 구별하여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일반적인 유대인과 구별하여 참전용사요 훈장 받은 유대인으로서, 최근에 귀화한 시민과 구별하여 독일 태생의 선조를 가진 가족들로서 등등)를 수용함으로써 존경받는 유대인 사회의 도덕적 붕괴는 시작되었다. (오늘날 그런 문제들이 마치 재난이 임박했을 때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품위를 상실시키는 어떤 인간 본질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종종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이와 동일한 특권을 가진 정부로부터 제안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한 프랑스 유대인 참전 용사의 태도를 회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공직자라는 우리의 지위에서 나오는 어떠한 예외적 혜택들도 거부한다는 것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말할 필요 없이 나치스 자신들은 이러한 구별을 진지하게 간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범주들은 끝까지 어떤 기능을 담당했는데, 왜냐하면 이 범주가 있음으로 해서 독일인들 사이에 발생할 어떤 불편함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만 이송된다거나, 징집 기피자만 대상이라거나 하는 식이었다. 자신의 눈을 감지 않으려 한 자들에게 "일반적 규칙을 보다 쉽게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예외들을 허용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음이 분명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한 의미는 해설에 있다. 열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재판 과정과 결과,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발생한 유대인의 학살에 대한 실태만으로는 보고서의 명확한 의미 전달이 부족했을 것이다. 영화 자체보다 영화 해석이 더 재미있을 때가 있듯이 재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해석과 후기가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 세기적인(?) 재판이 우리 인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다시 들춰내고, 아픔을 상기하고, 죽음을 슬퍼하고, 잔인성에 눈살을 찌푸리고, 화내고, 미워하고, 다시 아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아픔을 기억해야 하는가? 나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도,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끔찍한 범죄라도 한 번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다시 반복될 가능성은 항시 존재한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인류사에서 한 번 발생했던 일은 처음 발생하는 것보다 쉽다.

 

 

 

일단 한번 등장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위는 그러한 발생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남는 것은 인간적 사건들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어떠한 처벌도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는 충분한 억지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 반대로 일단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처벌이 무엇이든 간에 그 범죄의 재출현은 그의 최초의 출현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높다. 나치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재발할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특정한 이유들은 훨씬 더 그럴듯하다. 근대 인구 폭발과 기술적 장치들의 발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두려운 사실, 게다가 기술적 장치들은 자동화를 통하여 심지어 노동을 보더라도 그 인구의 많은 부분을 '잉여'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또 핵에너지를 통하여 마치 히틀러의 가스 시설을 사악한 아이들의 서투른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드는 도구들을 사용해서 이러한 이중적 위협을 처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이 다른 나치 장교들처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하고, 법정에서 졸고, 나는 몰랐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만 말했다면 이와 같은 세기적인 보고서가 나왔을 수 없을 것 같다. 아이히만은 오늘날 우리에게 희대의 흉악범으로 기억되지만, 그가 갖춘 내면의 성숙함과 수준 높은 인격은 경탄할만하다. 최소한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는 대국민 학살범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것은, 피고를 '도착적 가학적 음란증 환자'로 명백히 잘못 서술한 검찰 측을 판사들이 따르지 않은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우스너 씨가 이 세상이 지금까지 본 가장 비정상적인 괴물을 재판하며, 이와 동시에 그 안에 있는 "그와 같은 많은 이" 심지어 "나치 운동 전체와 반유대주의 전반"까지도 재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이러한 검찰 착의 진술에 담긴 비일관성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적했더라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말일 아이히만이 실제로 괴물이었더라면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판은 중지되어버렸거나 또한 최소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을지라도, 실제로 아이히만이 괴물이라고 믿는 것은 많은 위로를 줄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푸른 수염의 사나이를 무대에 올려놓음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또 전 세계로부터 편지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할 일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뉘른베르크에서 피고와 그의 변호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히만 재판에서 나온 증거는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문에서 후기까지 빠짐없이 읽었음에도, 마지막 페이지에 찍힌 마침표까지 시선이 흘러갔지만, 한동안 책에 대한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로 장황한 이야기를 이어나갈지가 자신이 없었고, 이런 말들을 뱉어도 될 런지에 대한 의문을 씻을 수 없었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데 그저 하루를 사는 갑남을녀처럼 시간이 지나면 잊힐 이의 의견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표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표현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무관심과 방관과 순응과 복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에 걸맞은 작은 시도 정도로 해두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때문에 선택한 책, 언제 어떻게 구매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책 한 권이었다. 너무 무거워서, 어려워서, 어두워서, 대면하기 싫어서 미뤄 두었던 숙제를 해버린 기분이다. 연말에 아주 적절하게 적당한 시기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책 한 권 정도는 만나보길 추천한다.

 

 

 

 

"1년 반 쯤 전[즉 1959년 봄] 저는 독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인으로부터, 어떤 죄책감과 같은 느낌이 독일 청년 일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 수색대가 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 제 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 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서 결백하기 때문이죠."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마지막으로 아이히만의 변론의 일부를 덧붙인다. 공개 처형을 요구했던 아이히만의 항소는 심의에서 기각되었다. 항소가 기각되었음이 결정되고 두 시간 만에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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