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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에세이

'사람에 대한 예의' 책 리뷰

by suis libris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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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후에 다시 보자는 말로 끝나던 〈사랑과 전쟁〉은 어머니의 최애 프로였다. TV를 거의 시청하지 않던 어머니는 내가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남의 집 막장 스토리를 틀어 놓으셨다. 그 기가 막힌 얘기들이 진정 어머니의 흥미를 끌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이만 가득 찬 당신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매번 막장으로 치닫는 스토리가 보기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불편한 얘기들을 왜 계속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둡고 더럽고 아픈 다른 이들의 각색된 드라마를 굳이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방영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추잡한 사실을 마주한 불쾌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가정에는 서로의 배우자를 배신하거나 바람피우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고부, 형제, 친척 간의 갈등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듯 보였다.

 

“엄마, 도대체 남의 집 막장 드라마를 왜 계속 봐?”

“모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잖아. 알아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나랑은 상관없는 막장 스토리를 뭣에 쓰려고?”

“혹시 모르지, 가까운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매번 우울한 얘기만 보니까 괜히 나까지 우울해지는 것 같네. 이런 건 굳이 알 필요 없잖아?”

“아이고, 너는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큰일이다. 어떻게 예쁘고 좋은 일들만 겪으면서 살래?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지.”

 

이어지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굳이 알려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모르고 싶다고 어떻게 평생 모를 수만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알고 싶지 않은 어둡고 더럽고 불공평한 현실을 맛보면서 적잖게 화가 났고, 놀랐고,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입수하는 것 같은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교과서를 통해서 배웠던, 그리고 기대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불편해도 알아야 하는 사실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피상적이기만 한 진실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풀어서 설파할 필요는 있다. 같은 맥락에서 권석천의 《사람에 대한 예의》는 그 어두운 실체를 말한다. 일부이지만, 못생긴 사회의 일부를 감정적이지 않게, 불만이나 분노를 조장하지 않는 시선으로 서술한다.

 

책에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주제들의 얘기가 실려 있다.

 

 

조직에서 성질 더러운 팀장의 실질적인 필요성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고, 조직에서 잘나가는 인간들을. 오너나 상관 앞에서는 자기 간이라도 빼줄 듯이 살갑게 굴다가도 직원들 앞에만 서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오너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고?

이보게, 친구. 그들은 다 알고 있네. 알고도 모르는 척할 뿐이지. 왜냐고? 그게 편하거든. 말 잘 듣는 ‘나쁜 놈’ 하나가 분위기를 휘어잡으면 오너 자신은 품위 있게, 우아하게 웃고만 있으면 되거든. 그 ‘나쁜 놈’이 조직을 망가뜨릴 지경이 되면 다른 ‘나쁜 놈’으로 대체하면 되는 거고….

 

 

 

화와 스트레스가 약자들에게 흘러가는 악의 낙수 효과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네가 뭔데 왜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어깨를 치고도 왜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충격 요법이라 말하며 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

 

“너 다이어트 하라고 충격요법 쓴 거야.”

공부든, 일이든, 다이어트든 ‘충격요법’은 만병통치약이다. “다름 아닌 너를 위한 것”이란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직장에서도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일을 빨리 배워야 한다”며 사랑의 회초리를 든다. “처음에 잘 배우고 적응을 잘해야 회사 생활을 잘할 수 있다”면서.

 

 

 

 

 

무기력이 만들어낸 사회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악의 평범성 같은 주제들이다

 

“저는 그냥 받아주는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요.”

내가 ‘그냥’이란 부사를 다시 떠올린 것은 어느 법정에서였다. 2018년 말 방송사에서 신문사로 복귀한 뒤 다짐한 게 있었다. ‘중요 사건이 아니더라도 한 주에 한두 번은 법정에 들어가 보자.” 그즈음 지켜본 재판이 있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된 특수절도 사건이었다. 심야 시간대에 상점 문을 뜯고 들어가 돈을 훔친 혐의로 청소년 네 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범행은 특별할 게 없었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들의 무표정 때문이었다. 그 누구의 표정에서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울먹이기는커녕 자신이 놓인 상황에 대한 분노나 슬픔, 아쉬움, 후회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왜 법정에 앉아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는 듯했다. 몸은 법정에 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검찰 구형 후 판사가 물었다. 한 명씩 차례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국선변호인과 가족이 ‘고개를 숙이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은 교정시설 관계자나 가족 손에 이끌려 법정을 나갔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 일에 무감각할 수 있을까. 자기 일로,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는 걸까. 당사자들과 직접 얘기 나눠볼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 관한 의문은 빈칸으로 남았다.

그때, 내가 세워본 가설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외부에서 부정적인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순응해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는 의욕을 잃는다. 의욕의 문제만이 아니다.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다.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찌들어 있는 생활인이라면 이 정도 부당함에 분노하지 않았던 이가 없을 만큼 흔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우리도 그 추함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에게 자신을 그렇지 않다며 고결한 척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 속내에는 ‘나 정도면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사회적 불합리를 고발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을 좌우를 바꾸고 위아래로 돌려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사회가 되지 않는다. 과거 〈사랑과 전쟁〉을 보면서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남의 집 막장 가정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면교사로 삼아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어야 했다. ‘나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나?’ ‘나는 화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진 않았나?’ ‘다른 이의 악을 방관하거나 이용하지는 않았나?’ ‘그저 말 잘 듣는 악인이지는 않았나?’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진정한 빌런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는 순간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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