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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에세이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 책리뷰

by suis libris 2020.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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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잘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웬만한 일에는 그저 초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분명 어지간히 크고 작은 상처에는 이골이 날 만큼 긴 시간을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상처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과거의 상처는 들추고 싶어 하지 않고, 상처를 준 이들에게는 어금니에 힘이 들어갈 만큼 분통을 느낀다.

 

상처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피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거나, 진심을 다 하지 않거나,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지긋지긋해진 상처의 고통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다.

 

진정 상처 받지 않는 삶을 원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어기제가 동작하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는다. 마음에도 탄성이 있는 것처럼 머물러 있던 상처가 사라지면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별에 아파하는 동안에는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은 하지 않겠다'며 마음을 견고히 다져보지만,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되면 마음은 언제나 푸딩과 같이 말랑말랑하게 변한다. 어떤 때보다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의 상처에도 함께 아파하고, 분개하고, 걱정하는 게 우리인데 말이다.

 

우리가 겪는 상처와 고통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은 상처에 관해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왜 상처를 받는지, 어떻게 상처를 받아들여야 하고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몇 가지 철학적(?) 입장에서 설명한다. 비록 분명하고 명백하고 단순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단 한 가지의 논제로 책을 이끌어가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마주하는 상처에 관해 다시 한번 사유思惟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토드 메이 《부서지기 쉬운 삶》

 

 

 

누구나 상처를 받으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흔들리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선택을 한다. 다시 비슷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신을 꽁꽁 싸맬 것인가, 내가 아픈 만큼 상대방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 줄 것인가, 아니면 쓰라린 상처를 받아들이고 함께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셋을 모두 선택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그 어떤 것도 속이 후련하진 않다. 이미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해도 아프다.

 

 

 

결과적으로 상처받지 않음보다 상처 받음을 특징짓는 것이 더 어렵다. 상처 받지 않음의 교리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상처 받음의 교리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상처 받음에 중심 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에 초연해지지마라. 그러나 적어도 고통으로 인해 비참해지지는 마라.” 또는 이와 같을 것이다. “최대한 상처에 취약함을 인정하라.” 상처 받음의 중심 주장으로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인 주장을 내세운다면 고통이 발생하는 다양한 방식을 축소해버릴 위험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토드 메이 《부서지기 쉬운 삶》

 

 

 

상처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하든 나는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받은 상처에 둔감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좋지 않다. 가끔 보면 씩씩한 척, 잘 이겨내는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지만, 그렇게까지 애쓰며 허덕일 필요 없다. 누구나 여린 속살은 있고, 타인이 그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도 너만큼 힘들다는 표현 정도는 마음껏 해도 괜찮다.

 

 

 

과거의 무게가 의미 있음과 고통을 모두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무게, 미래의 죽음의 무게는 의미의 근원이 될 수도 고통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토드 메이 《부서지기 쉬운 삶》

 

 

 

상처는 대부분 과거에서 오지만, 미래의 불안함이 또 다른 고통이 되어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과거에도 무게가 있지만,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도 그 무게가 있다. 더욱이 당장 눈앞에 다가올 미래가 암울하다면, 그 무게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 미래가 굳이 죽음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현판으로는 맥머핸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미래를 지향하므로 신체적 통증과 관련한 고통이 약화될 수도 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중요한 일을 하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다리를 설계하거나 매일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동물들과 달리 위안을 받게 된다. 신체적 통증과 과제 사이의 관계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 관계는 과제를 방해할 수 있고, 과제에 참여하는 미래의 능력을 걱정하는 원인이 된다. 반면 그 과제는 신체적 통증의 영향을 막는 방법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는 통증의 특성과 정도 그리고 연관된 과제에 달려 있다.

 

토드 메이 《부서지기 쉬운 삶》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성취감과 경제적 보상, 목표한 바를 달성하겠다는 욕구는 신체적 통증과 심리적 고통을 경감시켜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부서지기 쉽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래지향적 삶을 살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없애는 데 약 외에 철학도 있다. 
몇몇 철학은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내가 재미없는 철학책을 자주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끔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된다. 때로는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도록 해주고, 새롭게 얻은 안경을 끼고 삶을 바라본다. 새로 얻은 안경은 제법 유용하다. 나와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얽히고설켰던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주기도, 일상생활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번에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부서지기 쉬운 삶 속에서 가질법한 주제에 대해 사유해볼 기회가 되었다.

 

 

 

 

“철학의 목적은 추상적인 이론을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 하물며 텍스트의 해석은 아니며 - 삶의 기술에 있었다. 철학은 구체적인 태도이자 명확한 생활 양식으로서 평생 종사하는 것이다.”

 

철학은 많은 역할이 있고, 내 삶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 철학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다. 

 

토드 메이 《부서지기 쉬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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