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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 리뷰

by suis libris 2020.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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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중세 유럽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마녀사냥이라는 행위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수’가 ‘소수’에 대한 혐오와 비판, 그리고 기득권 집단에서 신생 혹은 위협 집단에 행해지는 무차별한 탄압이다. 실제 마녀가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마녀가 있다면 슈퍼히어로가 지구를 수십번 구했어야 한다.

 

요즘의 마녀사냥이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물리적 살인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다. 신체적 살인이 없다 뿐이지 소셜미디어나 각종 미디어와 지인들의 시선 등이 사회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21세기에 일어나는 마녀사냥을 주제로 한다. 자칫 여성이라는 지위와 평등에 관한 소설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케케묵은 기존 질서를 고집하는 이들에 대한 잔인함과 폭력성을 말하는 듯하다.  

 

 

파울로 코엘료의 《포르토벨로의 마녀》

 

 

소설에서 마녀사냥의 피해자로 주인공 아테나를 그린다. 진짜 이름은 셰린이다. 집시의 딸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입양됐다. 소설 초반부터 아테나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목에서도 그리고 마녀사냥이라는 말에서도 그녀가 마녀사냥당했다는 것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 아테나의 시점에서 서술된 부분은 한 곳도 없다. 모두 그녀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와 인터뷰를 엮어 소설을 이어간다. 이미 살해되었으니 인터뷰를 할 수도,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할 수도 없다.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전개된다. 

 

아테나는 아야소피아라를 영접(?)함으로써 마녀가 되어간다. 춤추는 의식을 하고, 사람들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근심과 걱정 섞인 질문에 대답하고, 아픈 곳을 치료해준다. 정확히 중세 마녀의 모습이다. 그녀에게 몰려드는 인파와 그 사실을 경계하는 지역 목사와의 갈등이 짧게 그려진다. 갈등의 결과는 이미 알고 있듯이 전형적인 마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테나는 21세기 영국에서 살해되었다.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는 우리가 세상에, 또 우리 자신에게 완벽하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 속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공백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신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다른 소설처럼 강력하거나 격정적이거나 눈을 못 뗄 만큼 극박한 줄거리의 소설은 아니다.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다소 밋밋하지만, 본질을 탐구하려는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모두 읽고서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명확하지 않아 짧게 남겨진 작가의 말을 읽어 보았다. 여전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사회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이, 우리는 맡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편협함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닐까? 여전히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같은 입장을 고수하길 바라고, ‘나도 너와 같아’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내비쳐야 하는 잔인함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과 개인을 타겟으로한 무차별적인 공격 행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방법은 무엇일까? 문명은 끊임 없이 발달했지만 풍요로워진 만큼 여유 있고 성숙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변해야 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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