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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책 '인 콜드 블러드' 리뷰

by suis libris 2020.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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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1990년 가톨릭에서 처음 시작된 ‘내 탓이오’운동은 말 그대로 갈등의 원인을 자신 내면에서 찾아 해결하자는 운동이다. 처음에는 평신도 신뢰 회복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아주 어릴 때 기억에는 동네 어른들이 한참 말다툼을 하다가는 “모두가 내 탓이지…”라며 싸움을 끝내기도 했다.

 

남 탓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네 탓’이라는 문화 때문이었을까? 각박해지는 사회적 환경에서 ‘내 탓이오’운동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는 심리는 무섭고도 위험한 일이다. 남에게서 찾은 이유 때문에 남을 원망하고, 화내고, 시기하고, 결국에는 무차별적으로 폭발해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녀석 때문에 힘이 든다고. 그놈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당신 때문에 불행하다고. 그리고 나는 억울하다고. 말한다.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묻지 마 식 범죄는 이미 많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다뤄지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더 이상 먹기 위해 사냥하거나 빼앗거나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극히 개인적인 분노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원망이, 그리고 가끔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남을 해하는 범죄가 행해진다. 이러한 범죄는 무섭고 잔인하고 서늘하다.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공포에 무뎌졌지만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가 1966년 실화를 배경으로 한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를 출간할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공포는 대중적이지 않았다. 범죄 심리학이 발달했고, 반사회성 성격장애ASPD(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라는 단어가 학술적으로 정립될 만큼 대중적이 되어버린 오늘날에는 과거만큼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한참 전 시대에 소설이 전달한 충격과 공포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1924 – 1984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Breakfast at Tiffany’s》로 더 유명한 트루먼 카포티는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서 짧은 살인 사건 기사를 보고 《인 콜드 블러드》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또 묻지 마 식 살인 사건이라고 하겠지만, 그는 그 사건을 미스터리 투성이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캔자스주에서 가족 4명 살해”라는 기사를 보면서 낯선 평범함이 느껴졌다고 당시 그의 생각을 묘사한다. 그는 6년이라는 시간이 들여 소설을 완성했다. 서부 캔자스 지역에서 사건을 조사했고, 범인이 잡힌 후 4년 동안 범인들을 면회했다. 그의 노력으로 범죄 서사는 현장 조사와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쓰인 최초의 논픽션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홀컴 마을은 캔자스 서부, 밀을 경작하는 높은 평원 지대에 있다.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은 ‘저기 저쪽’이라고 부르는 외딴 지역이다. 콜로라도 주 경계에서 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인데, 단단한 푸른 하늘과 사막같이 맑은 공기 때문에 중서부라기보다는 극서부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투리에는 초원 지방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 목장 일꾼들의 비음이 섞여 있고. 남자들 대부분이 통이 좁은 카우보이 비자에 스테트슨모자를 쓰고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다닌다. 대지는 평평하고, 풍경은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광활하다. 말과 소 떼, 고대 그리스 사원처럼 우아하게 솟아 있는 모습은 멀리서도 나그네의 눈에 확 들어온다.


 

 

소설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범죄라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클러터 일가족이 엽총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증거도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은 우연한 제보에 의해 그 꼬리가 잡힌다. 경찰들은 페리와 딕을 용의선상에 두고 조사를 진행하고, 우여곡절 끝에 둘을 범인으로 체포한다. 처음에는 둘의 범행을 부인하지만, 심문 끝에 서로가 서로의 잘못이라고 자백한다. 둘은 재판에 넘겨지고, 사형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요즘에는 익숙하고 평범한 범죄 소설의 줄거리처럼 보이지만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사실을 기반으로 한 논픽션 소설이라는 사실이 소설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더욱 스산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살인 사건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가 냉철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 마을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 동기조차 알 수 없는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의 난항, 너무나도 하찮은 범행 동기와 그들의 행적에서 비치는 가치관이 오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럼 먼저, 가장 중요한 얘기부터 할게. 네가 잘못했건 잘했건 아빠가 책임질 일은 아무것도 없어. 네가 저지른 일은 맞든 틀리든 간에 너 스스로 저지른 일이야. 내가 알고 있기론 말이지, 너는 상황이나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하등 상관없이 너 좋은 대로만 하면서 살았잖아. 사람들이 상처 받건 말건.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 감옥에 있는 건 아빠한테도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나한테도 마찬가지야.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창피한 게 아니야. 나한테는 네가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법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뭐든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너는 편지에 은근하게 모든 문제가 네 탓이 아니고 다른 사람 탓인 것처럼 썼더라. 나도 네가 똑똑하고 어휘력이 있다는 건 인정해. 게다가 너라면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뭐고, 뭐든 하기로 한 일을 이루려고 정직하게 노력해볼 생각은 해봤니? 좋은 건 쉽게 얻을 수 없는 거야. 너도 벌써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겠지만 한 번 더 듣는다고 해될 건 없겠지.


 

 

 

이유가 없는 범죄에 대한 무분별함은 어쩌면 나 자신도 범행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이유가 있다면 조심하면 되지만, 피할 수조차 없는 위험은 언제나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든다. 이런 종류의 범행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거나, 분석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작품 속 범인들에게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를 원망하는 모습은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 자신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부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의 원흉을 외부에서 찾는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통해서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죄책감마저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미안하게 생각하느냐고?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거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나는 그 일에 아무 감정을 못 느껴, 나도 내가 뭔가 느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심란하지 않아. 그 일이 일어난 후 반 시간쯤 지나니까 딕은 농담을 해댔고 나는 그 농담을 듣고 웃었지.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지도 몰라. 난 내 자신에 대해서는 유감을 느낄 정도로는 인간적이지. 넌 여기서 나갈 수 있어도 난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게 유감이야. 하지만 그게 다지.”

 

그렇게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컬리번은 믿을 수가 없었다. 페리는 혼란스러워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 양심이나 동정심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페리는 말했다. 

 

“왜? 군인들이 잠을 설치는 것도 아니잖아. 군인들은 살인을 하고 훈장을 받아. 캔자스의 착한 사람들은 나를 살해하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교수형 집행인들은 기꺼이 그 일을 맡을 거고. 사람을 죽이는 건 쉬워. 부도 수표를 돌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지. 이것만 기억해. 나는 클러터 씨 가족을 1시간 정도 알았을 뿐이야.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람들을 알았더라면 다른 느낌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이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방식대로라면, 사격장에서 표적을 고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거야.


 

 

오늘날 우리도 화가 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맞닥뜨린 시련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고,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또 그 화를 풀 또 다른 누군가를 찾는다. 주변에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불행한 삶을 사는 것 같고, 어떻게 해도 불행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그리고는 결국 폭발해 버린다. 

 

달리 보면 상처 많아서 아파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껴지지만, 남을 탓하지 않고는 이겨낼 수 없을 만큼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본 게 된다. 인터넷 창을 열면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모두가 뿔이 났기 때문에 더 숨이 막힌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모두가 누군가에게 화가 날 만큼 힘겨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겁먹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화를 낸다는 말처럼 자신의 실수를, 잘못을, 부족함을, 한계를 자신 있게 인정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남 탓하기에 바쁘다. 무엇이든 타인에게 이유를 전가해버리는 행동은 비겁하다. 이제는 '너 때문에’라는 케케묵은 핑계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남 탓만 하는 이들의 결말은 이미 소설이 되었다. 범죄 서사의 서늘함은 예전만큼 못하지만, 그 의미는 오늘 더욱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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