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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 리뷰

by suis libris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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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거라면?

나는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태연한 척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출생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너무 익숙하다. 국내에도 비슷한 소재의 드라마와 영화가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자동으로 떠오르는 클리셰가 있다. 서로 뒤바뀐 삶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원망과 갈등, 시기와 질투, 그리고 복수 같은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그림은 이제 지겹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의 원작으로 알려져 국내에서 더 유명해진 세라 워터스Sarah Waters의 《핑거스미스》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이용하지만, 익히 알고 있는 진부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운명 순응적인 모습의 주인공들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아가씨〉와는 사뭇 다른 결말을 맺는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는 영화와는 출발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야기로 남는다.

 

 

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영화 〈아가씨〉 포스터

 

 

소설 《핑거스미스》는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한다. 소설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런던의 도둑 소굴에서 큰돈을 빼돌릴 계획으로 브라이어 저택으로 오는 수전의 시점, 2부는 정신병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음란 서적을 읽기 위해 브라이어의 저택에서 삼촌과 함께 사는 수전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 3부는 다시 수전의 시점으로 돌아와 사건을 해결한다.

 

고아 수전은 석스비 부인에게 입양되어 런던 랜스 스티리트에 있는 도둑들의 소굴에서 소매치기로 키워진다. 어느 날 젠틀맨이라고 불리는 리처드가 석스비 부인에게 거액의 상속녀 모드를 꿰어 재산을 가로챌 계획이 있으니 수전을 상속녀의 하녀로 들어가 자신을 도울 것을 제안한다. 젠틀맨은 모드와 혼인한 다음 모드를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놓고 그녀에게 돌아갈 재산을 가로채겠다는 계획이다.

 

수전은 리처드의 계획대로 브라이어의 저택에 사는 모드의 하녀로 들어간다. 하지만 모드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리처드는 모드에게 자신과 저택을 빠져나가 혼인을 한 다음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아 런던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자고 제안한다. 삼촌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새로운 신분이 필요했던 모드는 하녀 수전을 정신병원에 가둬 놓고 그녀의 신분으로 살아갈 것을 계획한다. 학대를 받으며 음란 서적을 읽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드는 리처드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모드와 리처드는 저택에서 도망처 나와 혼인을 하고, 수전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석스비 부인이었다. 그녀는 석스비 부인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된다. 과거 어떤 사건으로 그녀와 수전의 삶이 바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모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는 석스비 부인의 집에서 도망쳐보지만 갈 곳을 잃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수전은 브라이어에서 함께 지내던 어린 하인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수전은 석스비 부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로 런던으로 향한다. 수전은 자신을 속인 리처드와 모드에 대한 복수심과 석스비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랜스 스티르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모드와 리처드가 석스비 부인과 함께 묶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복수심에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일련의 사건으로 소동이 마무리된다.

 

 

 

BBC Drama - Fingersmith

 

 

소설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다양하고 폭넓은 해석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라도 읽어나가기에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개인적으로 3부에서 보여주는 모드와 수전이 자신들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후에 겪게 되는 반응과 선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브라이어에서 탈출해 런던으로 온 모드는 자신이 원래 랜스 스트리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브라이어에서의 비참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떠올리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였기 때문에, 그 대상을 잃게 되는 상실감과 꿈꾸던 삶을 살 수 없다는 실망감에 현실을 부정한다. 그녀는 석스비 부인의 집에서 탈출해 보지만 런던의 냉혹한 현실을 경험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정신병원과 브라이어의 저택에서 평생을 보낸 그녀가 스스로 살아가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모드의 선택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타당하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실적 무능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 벽 앞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치 해외로 유학이나 여행을 가더라도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방법부터 버스를 타고 내리는 방법,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방법들을 새로 익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전은 가장 늦게 출생의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에 아파하지만 상처보다는 과거 함께 했을 시절의 그리움이 더 크다. 하루아침에 큰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그녀는 브라이어에 있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단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수전은 아무것도 없이 충분히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생활력이 뛰어나고 세상살이에 익숙하다. 그런 그녀에게는 물질적 풍요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 ‘망할 자식!’ 오,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해도 그놈에겐 너무 가벼운 벌이었어!”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제, 널 보고, 네가 여기 있는 걸, 아직도 여기에 저 책들 사이에 있는 걸 보게 되다니…!”

 

나는 서가들을 둘러보았다.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는 모드에게 가서 가까이 잡아당기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모드가 나를 막았다. 다른 때였다면 내가 분명 당당하다고 생각했을 그런 태도로 모드가 고개를 움직였다.

 

모드가 말했다. "<그 사람> 때문에 날 동정하진 마. 그 사람은 죽었어. 그러나 난 아직도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나 그대로야.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야만 해. 책의 반절은 훼손되거나 팔렸어. 그러나 난 여기 있어. 그리고 여길 봐. 넌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해. 내가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지 봐."

 

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소설 《핑거스미스》의 전반부는 이미 영화로 접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선택에 대한 당위성을 갖고 이야기를 읽어 나가기에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는 소설이 폭넓은 감상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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