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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튀르키예소설 '내 이름은 빨강' 리뷰,

by suis libris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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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무슬림의 차이를 궁금해하지 않을 만큼 중동의 문화에는 무심했다. 한때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던, 혹은 영화에서 봤던 그런 이미지뿐이다. 큰 그릇에 반찬과 밥을 넣고 오른손으로 주물주물하며 앞에 앉은 처음 보는 이들과 식사를 했음에도 나에게 중동은 여전히 낯선 땅처럼 느껴졌다.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만 붙었지, 터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터키 문학을 손에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 접하는 터키 문학은 묵직했다. 전통을 지키려는 장인정신과 시대적 변화 사이에서 예술에 대한 순수성의 충돌은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998년에 쓰인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세밀화가들의 살인과 그 살인을 파헤치는 일화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터키 문학 중 하나이다. 이 이외의 이슬람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은 거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낯설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새롭고 흥미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욱이 세밀화가라는 소재는 소설에 대한 구미를 당기게 하는 또 다른 요소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서양 미술사나 서양 화가들의 삶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만 같다. 여행도 그렇듯 소설도 아는 만큼 깊이 볼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밀화가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가치관을 공유하지? 오스만 제국과 같은 시대적 배경을 사전에 조사를 조금 하고 소설을 읽으면 더욱 깊이 즐길 수 있다. 사전 지식이 전무했기에 소설을 읽으면서 세밀화가에 대해 알아보고, 소설의 배경이 된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다.

 

 

 

세밀화Miniature (illuminated manuscript)

 

 

 

세밀화Miniature는 중세 고문서에 책에 그려지던 그림을 일컫는다. 물론 단어 뜻 그대로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마치 (포토리얼리즘과 같은) 극사실주의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슬람 문화권의 세밀화가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갖는다. 세밀화가들의 주된 목적을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소설에서도 술탄이 주문한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책을 만들고 복제하는데 세밀화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밀화가는 그림을 '신의 시선', 즉 알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 넣는다는 사명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신의 눈을 대신하고 있기에 화가 개인의 화풍이나 개성이 그림에 드러나는 행위는 극도로 꺼렸다. 누가 그렸는지조차 그림에 새겨 넣어서도 안 된다. 오직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화가의 개성이 드러난 그림은 그만큼 천박한 그림이었고, 대상이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림을 지향했다. 최고 경지의 세밀화가는 눈이 보이지 않고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수준의 화가인데, 눈으로 보지 않아도 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화가를 지칭한다.

 

어느 날 한 세밀화가가 살해된다. 작가는 살해된 세밀화가 엘레강스의 시점에서 소설을 시작한다. 이미 살해되어 우물 속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시체의 시점에서 사건의 문을 연다. 이미 살해된 시체의 시점은 강렬하고 독특하다. 어떻게 시체가 말을 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사건과 연계된 거의 모든 사물에 이입한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개, 나무, 말, 금화의 일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엘레강스는 화실의 리더 역할을 하는 에니시테와 다른 세밀화가들과 함께 비밀리에 책을 만드는 중이었다. 엘레강스가 살해되었음에도 에니시테는 책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책 때문에 벌어진 사건은 결국 에니시테까지 살해당한다. 책 제작에 참여한 4명의 세밀화가를 둘러싼 사건과 범인을 색출하는 줄거리다.

 

결론까지 잠깐 스포를 하면 살인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지만, 원근법의 도입을 두고 세밀화의 신성성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집착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르네상스 시절 원근법의 도입을 두고 살인이 일어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고 하던데,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터키 문학으로 그 일을 그린 것이다. 많이 알려진 내용이지만 원근법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을 신을 모독한 불성한 그림으로 여겼다. 가까이에 있는 사물을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신을 작게 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원근법은 전통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맥락에서 당시 세밀화가들에게 원근법의 도입은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모욕하는 일로 여겨졌다.

 

책을 덮고 나니 예술과 순수성에 관해 물음이 떠올랐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지켜야 했던 세밀화의 전통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세밀화가 개인의 개성이나 화풍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회적인 전통은 화가들로 하여금 눈이 멀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계적 노동을 신성시하려는 하나의 사회적 규약은 아니었을까? 눈이 보이지 않는 경지의 예찬은 마치 미를 위해 삶을 희생한 중국 전근대 전족을 한 여인의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 때문에 그들의 삶이 희생되었고 강요되었는지는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우리도 보이지 않는 철재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적 변화를 거스르고 전통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항상 있어왔고 언제나 필요한 목소리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도, 우리의 것을 지키면서 발전을 모색하려는 시도도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논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욕구가 억제된 환경에서 본능마저 억눌러야 하는 상황이 다소 과격한 극단주의를 낳은 것은 아닐까? 기본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제어할 수 있는 극단적인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오르한 파묵,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고향 거리의 우울한 영혼을 탐구하는 가운데 문명의 충돌과 혼합과 새로운 상징을 발견하였다”이다. 살인을 불사할 만큼 전통을 지키려는 자와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의 갈등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가 먹힌 것이다.

 

변화 앞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배타적 문화에 답답해하고 언제나 다양성을 지지해온 나로서는 새로운 자극제가 될 것 같다. 시대를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누군가는 과거를 기억하고, 그 순수성을 유지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어쩌면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구세대와 신세대, 전통과 신기술의 갈등도 비슷한 숙제를 안고 있지 않을까? 낯선 이스탄불의 한 겨울밤 변하지 않으려는 순수성에 취한 살인은 오늘 서울 한복판에서도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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