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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뷰

by suis libris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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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들은 잘 알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부분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극도로 불안해하는 시기가 있다. 일정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일정 시기 동안은 엄마에게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떼를 쓴다. 특히 출근하려는 어머니들에게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놔두고 출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매우 안타까워한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6살까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 아침마다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잠시 장난감이나 먹을 것에 한눈이 팔려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순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욱 서럽게 울었단다. 목청도 커서 집안이 떠나가라고 족히 30분은 서럽게 울고는 우는 것에 지쳐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돌봐주시던 아주머니께서 하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누군가와 이별했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30분 동안 목놓아 우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구석에서 10분을 꺼이꺼이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얌전을 떨며 손님들을 맞았다. 그렇다고 이별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이들과 다양한 이별을 했다고, 절대로 이별이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무척이나 슬프고 속상하다.

 

'삶은 혼자’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부모님과 친구와 가족과 연인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동료나 길거리에서 만난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과도 때로는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늘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함께였던 것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다.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습지에 홀로 남겨진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소설은 혼자가 된 소녀의 성장기이다. 소설은 첫머리부터 가족들과의 이별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엄마가, 그다음에는 큰오빠와 언니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오빠 조디가 폭력적인 아버지를 못 견디고 집을 떠나갔다. 결국, 초라한 판잣집에는 매일 술에 취해 폭언과 폭설을 남발하는 아버지와 카야 둘만 남았다. 모두를 떠나보낸 폭력적인 아버지가 싫지만 카야에게는 마지막 남은 아버지조차 자신을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카야는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지만, 결국 아버지도 낡은 판잣집을 떠나가고 카야는 혼자 남게 된다. 카야는 가족들이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점핑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집을 지키며 혼자 그곳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런 카야를 마시 걸(marsh girl:습지 소녀)이라고 부른다.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 알려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습지 부근에서 발견된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을 둘러싼 사건과 카야의 성장 과정을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플래시백 되어 전개되는 카야의 성장 과정을 통해 그녀가 어떻게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지 전말을 설명하고, 사건에 관한 재판과 함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버림받았다는 상처, 그리고 상처로부터 기인한 아픔과 두려움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됐다. 혼자가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카야의 모습이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지만 내면에서 가지 말라는 말을 고양이에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녀가 안쓰럽다.

 

 

 


그런데 복도 바닥에서, 바로 쇠창살 밖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카야의 눈동자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선데이 저스티스가 초록빛 눈으로 카야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앞발을 깔고 앉아 있었다.

카야의 심장이 요동쳤다. 몇 주나 혼자 갇혀 있던 그녀에게 마법사처럼 쇠창살 너머로 이런 생명체가 찾아와 주다니. 그녀와 함께 있어 주다니. 선데이 저스티스는 눈길을 돌려 다른 수인들이 수다를 떠는 복도 저편을 바라보았다. 카야는 고양이가 자기를 버리고 그들에게 가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고양이는 다시 카야를 바라보고는 따분하게 눈을 끔벅거리더니 손쉽게 쇠창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안으로 들어왔다.

카야는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속삭였다. “제말 가지 마.”

 

(중략)

 

움직이면 고양이가 가버릴까 무서워서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씩 들썩거리며 스트레칭했다. 선데이 저스티스는 눈도 뜨지 않고 허벅지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카야 곁에서 몸을 말았다. 카야는 옷 입은 채로 그 자리에 누웠고 둘 다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카야는 고양이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따라서 잠이 들었다. 더는 화들짝 소스라쳐 깨어나지 않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통 빈 평온 속에 표류했다.

밤중에 카야는 딱 한 번 눈을 뜨고 벌렁 나자빠져 세상모르게 잠든 고양이를 보았다. 앞발은 위로 쭉 치켜올리고 뒷발은 아래로 쩍 벌린 채였다. 하지만 카야가 새벽에 일어나 보니 고양이는 이미 가고 없었다. 아무리 삼켜도 목구멍에서 아픈 신음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어떤 이야기든 희극comedy 보다는 비극tragedy 가 더 강인한 여운을 남긴다.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이 모든 사건이 해결된 상태보다 강렬하게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비극의 정점까지 몰고 가지 않고, 희극으로 끝맺은 것은 삶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작은 상처에도 모든 것을 잃은 듯 아프지만, 그 시기가 조금만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고, 다시 졸리고, 다시 일어나고 싶어 진다. 언젠가 삶을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를 제지당한 사람의 94%가 다른 장소나 방법을 찾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소설과 그 글의 의미는 삶의 희망이라는 부분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어떤 상처는 흉터로 남아 평생 아픔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결국 상처는 아물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생활한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짧게 보면 비극일지 몰라도, 길게 보면 모든 삶은 희극이다.’라고.

 

 

 


“꼬마 돼지만 집에 남았어요.” 카야는 철썩이는 파도를 보고 말했다. 조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카야는 별안간 판잣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복도에서부터 오빠 이름을 소리쳐 불렀지만 조디의 물건들은 이미 사라지고 바닥의 홑청도 홀딱 벗겨져 있었다.

카야는 오빠의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아주 짧은 찰나 어지러운 침대며 묵은 빨래 더미들이 바깥의 나무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카야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기에 놀랐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허기. 부엌으로 가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언제나 빵을 굽고 강낭콩을 삶고 생선 스튜를 보글보글 끓이는 열기에 뜨거웠던 방이었는데, 이제 부엌은 퀴퀴하고 고요하고 어두웠다. “이제 밥은 누가 해?” 카야는 소리 내어 물었다. 사실 ‘이제 누가 춤을 추지?’라고 붇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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