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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문학

[고전 소설] 조지 오웰의 '1984' 리뷰

by suis libris 2020.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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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세상일까? 지구 멸망보다도 더 끔찍한 디스토피아는 생각할 힘을 잃어버린 세계인 듯 싶다.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조차 없고,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세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역사, 문화, 교육, 노동, 사랑과 쾌락마저 조종되는 사회가 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Nineteen Eighty-Four》는 그런 세상을 책 한 권으로 집약해 놓았다. 생각하는 능력조차 없애버리는 세상을 보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을 떠올렸다.

 

 

1984 초판본 표지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는 그의 9번째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라서 그런지 디스토피아를 전체주의와 국민 사찰, 억압과 통제가 보편화된 세계로 그리고 있다. 자신을 민주적 사회운동가라고 자칭했던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등장하는 세계관을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러시아나 이탈리아, 독일과 같은 권위주의적 정부를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현실적이고 정치적 역학 관계에 입각한 묘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야기는 1984년 끊임없는 전쟁과 대중적 감시, 선전과 선동, 역사 부정 등이 만연하게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일어난다. 영국은 오세아니아라고 불리는 거대한 초국가의 수도가 되었고, 오세아니아는 빅브라더라는 전체주의 사상 리더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다. 사상경찰은 대중을 감시하고, 텔레스크린은 끊임없이 명령한다. 매일 2분간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이 틀어지고 대중은 열광한다.

 

주인공 윈스턴은 기록을 왜곡하는 능숙한 기록 관리자다. 그는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지만 내면에는 선동과 선전에 의해 조종되는 대중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당원들을 은근히 미워한다. 애정행각마저도 애국이라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자유연애와 성욕 또한 금지 대상이다. 하지만 윈스턴은 활발하게 당원 활동을 하는 줄리아와 금지된 연애를 하면서 쾌락을 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금지된 도서를 읽고, 반란을 꿈꾸고, 왜곡된 역사와 빅브라더가 지배하기 이전 세상에 대해 관심 갖게 된다. 하지만 줄리아와의 관계도, 반란도, 왜곡된 역사와 반란도 모두 발각되고 고문 끝에 사회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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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영문 소설답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국민을 완전히 통제하는 정부를 묘사하는 오웰리언Orwellian이나 독재자를 의미하는 빅브라더big brother, 이중사고doublethink, 신어newspeak, 메모리 홀memory hole, 2분간의 증오Two Minutes Hate, 텔레스크린telescreen, 101호room 101 등 수많은 관용어구를 남겼고, 문학적으로 다양한 클리셰cliché를 만들어 냈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동료들이 떠올랐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회사원들이었다. 가끔 그들에게서 알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생각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의견이 있고, 생각이 있었지만 돈통 표현하지 않았다. 반항보다는 수긍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나 자신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쳐왔다. 무작정 열심히 했고, 주어진 조건에 자신을 깎고 다듬어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 맞춰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윈스턴이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 (법이란 게 없으니 불법이란 것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 노동 이십오 년 형의 선고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윈스턴은 펜촉을 펜대에 꽂고 펜 끝의 기름기를 닦아냈다. 펜은 서명할 때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구식 필기도구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것을 남몰래 어렵사리 구한 이유는 근사한 크림색 노트에는 볼펜으로 끼적거리기보다 진짜 펜촉으로 써야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손으로 글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 외에는 모든 것을 구술기록기에 불러주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펜촉을 잉크에 적시고 잠시 머뭇거렸다. 짜릿한 전율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아직도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며 무작정 달려 나간다. 입시에 쫓기고, 취업에 바쁘고, 성공에 매진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숨 쉴 틈조차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여유를 즐길 시간조차 없이 청춘을 흘려보낸다. 이제는 그냥 바쁘다. 무엇이 바쁜지 모르지만, 시간이 없다.

 

자유롭게 생각하면 안 되는 교육을 받고, 말을 잘 들어야 좋은 평가를 받고, 잘 따라와야 혜택이 주어진다. 룰을 위반했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를 지나치게 크게 부풀려진다. 반항은 곧 문제로 취급받는 분위기 속에서 룰을 어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힘들지만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자신을 죽이고 조건에 맞춘다. 반항을 결심하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결단력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같은 식의 일률적인 부의 증가는 계층적 사회의 파괴를 초래할 위험(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파괴이다.)을 안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적게 일하고 배불리 먹으며 목욕탕과 냉장고가 있는 집에서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소유하고 산다면, 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불평등의 구조는 틀림없이 붕괴되고 말 것이다. 만약 부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물론 개인적 소유와 사치라는 의미에서 부가 공평히 분배되는 한편으로 권력이 소유 특권계급에 의해 장악되는 사회를 상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회는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시간적 여유와 함께 경제적 안정을 똑같이 누리게 되면 빈곤에 허덕인 나머지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중이 마침내 눈을 뜨게 되고, 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결국 소수의 특권층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경제적, 그리고 시간적 여유조차 없는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복종에 익숙해진다. 어쩌면 '길들여진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들여진 사회에 맞춰 생활하다 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며 특권층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부유한 위치에서 삶을 영위하고, 남들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서기 위해 반항아가 되려는 위험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복종하는 선택을 한다. 수긍하고 빨리 적응하는 것이 더 안전한 선택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계층 사회를 영속화시키는 문제는 이보다 더 어렵다. 지배계급이 권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네 가지이다. 외부로부터 정복당한 경우, 비능률적으로 통치하여 군중이 봉기한 경우, 불만에 찬 중급계급이 강력한 세력을 형상한 경우, 통치할 자신감과 의욕을 잃은 경우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어느 하나만 작용하지 않고 무슨 법칙처럼 네 가지가 거의 동시에 작용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지배계급만이 영원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결정인자는 지배계급 자신의 정신 자세이다.

 

20세기 중엽 이후 첫 번째 위험은 사실상 사라졌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의 세계를 분할 지배하고 있는 세 열강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점차적인 인구 감소에 의한 것뿐인데, 광범한 권력을 가진 정부는 이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있다. 두 번째 위험도 이론에 불과하다. 군중은 결코 자발적으로 봉기하지 않는다. 압제를 받아도 봉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비교할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당연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믿음만 심어줄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안도감에 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월급을 마약이라고 부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디스토피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디스토피아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도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닐까? 상상하고, 고민하고, 비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조차 빼앗겨 버린 세계에서 희망을 떠올리기 힘들다. 우리는 거대한 굴레 앞에서 충분히 도전할 수 있고, 반항할 수 있고, 시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누구도 도전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아도 말하지 않고, 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타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론은 그 거대한 힘 앞에 윈스턴의 작은 반항이 무참하게 짓밟히며 끝맺는다. 거대한 굴레 앞에서 그는 항복해버린 것이다. 더 이상 거스르려 하지 않고, 반항하려 하지 않고, 도전하려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쉬운가! 항목만 하라. 그러면 모든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자신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어떤 경우에든 예정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는 왜 자신이 지금까지 반항해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쉽다. 다만….

무엇이든 진실일 수 있다. 소위 자연법이란 것은 엉터리이다. 인력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한다면 비눗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윈스턴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냈다. 오브라이언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윈스턴 자신도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난파선의 꼬리가 물 위로 불쑥 솟아오르듯 이런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상상일 뿐이지. 그건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아.’ 그는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잘못된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진짜’ 일이 일어나는 ‘진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마음에서 생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진짜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비판적인 사고를 하며 지내왔을까? 무조건적인 수용과 믿음의 편리함에 빠져 있는 것을 아닐까? 어쩔 수 없다고 말은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고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안일함이 아쉽다. 가끔은 결단이 필요할 때도 있다. 반항이 문제가 아니듯 복종은 굴복이 아니겠지만, 옳다 그르다 이야기할 수조차 없는 믿음은 경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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