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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독후감/자기계발서

소설 '인간 실격' 리뷰

by suis libris 2020.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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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모님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1948년 5월 12일 출간) 지극히 유명한 소설 《인간 실격》이라는 소설을 나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언제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목으로 통하는 그리고 그 소설 자체로 의미하는 소설들이 제법 많다. 책의 내용을 직접 읽어보지 않았어도 말이다. 《인간 실격》을 알게 된 건 아마도 중고등학생 때는 아니었을 것 같다. 미성년자에게 추천하기에는 내용도 그렇고, 여자와 마약(모르핀), 자살, 술집과 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

 

언제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소설을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다시' 샀다. 막상 책을 사서 구매할 때는 ‘다시’ 샀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집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한 영문판 책을 보고 다시 샀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중국에서 산 책도 책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 보니 기억도 나지 않는 읽지도 못할 책들이 제법 책장에 제법 많이 꽂혀 있다. 

 

 

 

인간 실격, 한글 번역본, 영문 번역본, 중문 번역본

 

 

 

 

소설은 그리 길지 않다. 한 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짧은 분량이다. 소설은 제1의 수기, 제2의 수기, 제3의 수기, 후기 이렇게 4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어린 시절, 청소년기(중고등학생 시절), 고등학교 퇴학 후 삶 정도로 구분이 된다.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면 요조라는 한 남자가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제법 부유한 환경에서 막내로 자란 주인공은 어렸을 때는 공부 잘하는 익살스러운 장난꾸러기였다. 하지만 그 익살스러움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가림막이었다. 사람들을 웃기고 장난치고 광대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두려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이후로 여자를 만나고,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마약(모르핀)에 중독된다. 결국, 정신 병원에 갇히게 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의 자세한 줄거리는 위키에 잘 정리해되어 있다. wiki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주인공이 느낀 인간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식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두침침한 곳에서 엄숙하게 하루 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는 적막함이 제법 강인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듯싶다. 

 

우리 집 식탁은 소설과는 전혀 달랐는데,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저녁 식사가 두세 시간 동안 이어진 적도 제법 많았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께 집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부모님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일화들로 당신의 철학을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나이가 많으신 할머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 주인공은 식탁에서의 두려움이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져나갔던 것은 아닐까? 

 

 


저도 물론 먹기야 잘 먹습니다만 배가 고파서 먹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귀하다는 음식도 먹어 봤고 고급스러운 음식도 먹어봤습니다. 남의 집에서 대접해 주는 음식은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그런 제게 어린 시절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바로 우리 집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고향 집에서는 열 명 남짓한 식구들의 독상을 두 줄로 마주 보게 쭉 늘어놓고 각자 밥을 먹었습니다. 막내인 저는 당연히 맨 아랫자리 신세였습니다. 식사하는 방은 어두침침했는데, 점심때 같은 경우 열 명 넘는 식구들이 말도 없이 밥만 먹는 모습을 보면 저는 늘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게다가 시골의 보수적인 집안이다 보니 나오는 반찬도 보통 그게 그거라 귀한 음식이나 비싼 음식은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식사 시간을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그 어두침침한 방의 구석 자리에 앉아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심정으로 밥을 조금씩 입에 밀어 넣고 꾸역꾸역 삼키면서, 인간은 왜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밥을 먹을까, 다들 참 엄숙한 표정으로 먹고 있네, 어쩌면 이것도 무슨 의식의 일종일까, 식구들은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시간을 정해 밥상을 가지런히 줄 세워 놓고 어두운 방에 모여서 먹고 싶지도 않은 밥을 말없이 씹으며 고개를 숙인 채 집안에 우글거리는 영혼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을 정도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험한 일상을 오래도록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 부담감 앞에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나…'하는 암담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인생이 쉽게 풀릴 거라는 기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잘 될 거라는 최면을 걸거나, 열심히 노력할 테니 노력한 만큼만 결과를 얻을 수 있길 바라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이런 삶의 부담감 앞에서 소설의 주인공 요조는 지나치게 연약하다. 연약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두렵기 때문에 기피하고, 맞서기보다 피하려는 선택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담배와 술에 대한 중독도 어쩌면 응당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회피하기 위한 도피처였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바꿔대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특히 이성과 함께한다는 사실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숨을 쉬는 동안에는 원인 모를 적막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외롭다’고 말하지 않았고 대신 지독한 외로움을 몸 외곽에 한 폭의 기류처럼 뿜어내고 있어서 그 사람 곁에 다가가면 제 몸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가진 뾰족뾰족 가시 돋친 음울함의 기류와 궁합 좋게 녹아들어 ‘물속 바위 위에 내려앉은 가랑잎’처럼 제 몸은 공포에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소설의 주인공 요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벗어나려 끊임없이 방황했을까? 하지만 삶 자체에서 기인하는 불안감에 힘들어하는 이들은 21세기가 1/5이나 지난 요즘에도 주변에도, 그리고 TV 속에도 제법 있다. 물론 나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지독하고 고독하고, 너무나도 적막하고, 두렵고 막막하다. 하지만 아직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누구나 이 정도 두려움은 안고 살고 있다고 위안하며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본문 - 인간, 실격. 이제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지만, 작가가 말하는 인간 실격이 어떤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에서 '인간, 실격.’이라는 문장을 읽었음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문 제목을 보는 순간 명확해졌다. 그다음에 따라 나오는 '이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에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인간 실격의 영제는 'No Longer Human'이다. 방황의 끝에 서서 자신을 돌아봤을 때, 너무 멀리까지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는 더는 돌아갈 수 없이 멀리 와 있는 자신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는 절망감 앞에 그의 선택은 분명했다.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 대해서 찾아보니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소설의 마지막 연재 직전에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도 소설 속 요조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부끄러운 생을 보내왔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두려움을 피해 도망친 과거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돌아보니 무척이나 부끄럽게 느껴졌을 것 같다.

 

 

 

 

인간 실격 초판본 디자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서 불쾌한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일탈과 몸부림,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 타락과 끊임없는 추락, 그리고 삶을 포기하는 결정이 무척이나 어둡다. 나에게는 세심하고 연약하고 부끄럽고 소심한 한 남자의 삐뚤어진 투쟁기처럼 보였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저 답답한 인간의 실패담 정도로 받아들여져도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읽히는 것은 이런 방황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짧은 소설 한 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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