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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127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 책리뷰 상처를 잘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웬만한 일에는 그저 초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분명 어지간히 크고 작은 상처에는 이골이 날 만큼 긴 시간을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상처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과거의 상처는 들추고 싶어 하지 않고, 상처를 준 이들에게는 어금니에 힘이 들어갈 만큼 분통을 느낀다. 상처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피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거나, 진심을 다 하지 않거나,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지긋지긋해진 상처의 고통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다. 진정 상처 받지 않는 삶을 원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어기제가 동작하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는다. 마음에도 탄성.. 2020. 11. 8.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 리뷰 나는 작품을 대할 때 작가가 여성인지 혹은 남성인지 의식하며 작품을 감상한 기억이 없다.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빛나고, 작가가 누군지에 상관없이 작품은 어느 정도는 독자에 따라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의 문학을 별도로 분류하진 않지만, 여성 문학은 구분한다.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이고,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고발이고,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깊숙하게 드리워진 선입견에 대한 경적을 울리는 작품이다. 그 작품 안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여성 운동이나 여성 권위 신장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서 당시 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여성에 대한 시선은 가끔은 참혹할 만큼 답답할 때가 많다. 누군.. 2020. 11. 3.
린다 개스크 '당신의 특별한 우울' 리뷰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그 이름 ‘우울증’. 가끔 기분이 몹시 가라앉거나 기분이 무척 안 좋을 때 ‘혹시 나도 우울증인가?’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혹시 나도 과거 한때 앓고 지나갔을지 모를 그 흔하디 흔한 우울을 나는 멀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하 깊숙이 가라앉은 것 같은 감정을 감히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냐고 겁을 집어먹고, 의례 포기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나는 우울에 대해서 무지했고, 그게 어떤 것인지 너무 몰랐다. 정신과 의사로서 우울증을 극복한 린다 개스크의 《당신의 특별한 우울》은 나에게 우울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주었.. 2020. 10. 27.
책 '명랑한 은둔자' 리뷰 한 때 에세이라는 장르를 편독했던 시절 나는 책으로 사람, 콕 짚어 말하면 책의 저자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 한껏 심취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 너머 그/녀와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모든 종류의 글이 똑같겠지만 에세이는 특유의 멋이 있었다. 작가의 일기장 같기도 했고, 이따금씩 낙서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순간 느낀 감정과 생각을 몇 페이지로 되살려냈고,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 일을 겪은 주인공의 생각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지 궁금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그 궁금증을 에세이로 풀었다. 오랜만에 내가 에세이를 즐겨 읽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책장을 덮고 겉면에.. 2020. 10. 24.
이탈리아소설 '어른들의 거짓된 삶' 리뷰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떡하면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 이제 곧 있으면 삶의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에 돌입하지만, 아직도 가끔은 ‘내가 지금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건가?’하는 의문과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다. 또래들은 가장이고, 이미 대부분 아버지가 되었고, SNS에서 추천해주는 친구들은 더 이상 철없이 방황하는 철부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성장 소설은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고, 시련을 겪고, 어린 주인공은 방황하고 흔들린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시련의 크기는 무척이나 크고 거대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성숙하지 않으면 어른이.. 2020. 10. 8.
에세이 '죽은 자의 집 청소' 리뷰 중세 유럽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다. 좁고 꼬불꼬불한 차도, 울퉁불퉁한 인도, 사람을 기다리고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광장, 낡은 건물과 가스등 모양을 한 거리의 가로등까지 옛 풍경이 그대로다. 도시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다.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유럽의 일부 도시들은 몇백 년, 혹은 그 이상 현재와 같은 도심으로써의 기능과 지위를 지켜오고 있다. 나는 이방인이 되어 도시를 여행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느껴보려 애써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차도 위를 달리는 전기 자동차와 낡은 건물에 들어선 익숙한 햄버거 가게들 뿐이다.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기억을 떠올리면 이런.. 2020. 10. 6.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 리뷰 내가 만약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거라면? 나는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태연한 척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출생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너무 익숙하다. 국내에도 비슷한 소재의 드라마와 영화가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자동으로 떠오르는 클리셰가 있다. 서로 뒤바뀐 삶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원망과 갈등, 시기와 질투, 그리고 복수 같은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그림은 이제 지겹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의 원작으로 알려져 국내에서 더 유명해진 세라 워터스Sarah Waters의 《핑거스미스》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이용하지.. 2020. 9. 29.
[고전 소설] 조지 오웰의 '1984' 리뷰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세상일까? 지구 멸망보다도 더 끔찍한 디스토피아는 생각할 힘을 잃어버린 세계인 듯 싶다.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조차 없고,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세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역사, 문화, 교육, 노동, 사랑과 쾌락마저 조종되는 사회가 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Nineteen Eighty-Four》는 그런 세상을 책 한 권으로 집약해 놓았다. 생각하는 능력조차 없애버리는 세상을 보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을 떠올렸다.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는 그의 9번째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라서 그런지 디스토피아를 전체주의와 국민 사찰, 억압과 통제가 보편화된.. 2020. 9. 7.
책 '인 콜드 블러드' 리뷰 ‘내 탓이오’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1990년 가톨릭에서 처음 시작된 ‘내 탓이오’운동은 말 그대로 갈등의 원인을 자신 내면에서 찾아 해결하자는 운동이다. 처음에는 평신도 신뢰 회복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아주 어릴 때 기억에는 동네 어른들이 한참 말다툼을 하다가는 “모두가 내 탓이지…”라며 싸움을 끝내기도 했다. 남 탓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네 탓’이라는 문화 때문이었을까? 각박해지는 사회적 환경에서 ‘내 탓이오’운동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는 심리는 무섭고도 위험한 일이다. 남에게서 찾은 이유 때문에 남을 원망.. 2020. 9. 7.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뷰 부모님들은 잘 알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부분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극도로 불안해하는 시기가 있다. 일정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일정 시기 동안은 엄마에게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떼를 쓴다. 특히 출근하려는 어머니들에게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놔두고 출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매우 안타까워한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6살까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 아침마다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잠시 장난감이나 먹을 것에 한눈이 팔려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순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욱 서럽게 울었단다. 목청도 커서 집안이 떠나가라고 족히 30분은 서럽게 울고는 우는 것에 지쳐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돌봐주시던 아주머니께서 하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 2020. 8. 6.
튀르키예소설 '내 이름은 빨강' 리뷰, 이슬람과 무슬림의 차이를 궁금해하지 않을 만큼 중동의 문화에는 무심했다. 한때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던, 혹은 영화에서 봤던 그런 이미지뿐이다. 큰 그릇에 반찬과 밥을 넣고 오른손으로 주물주물하며 앞에 앉은 처음 보는 이들과 식사를 했음에도 나에게 중동은 여전히 낯선 땅처럼 느껴졌다.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만 붙었지, 터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터키 문학을 손에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 접하는 터키 문학은 묵직했다. 전통을 지키려는 장인정신과 시대적 변화 사이에서 예술에 대한 순수성의 충돌은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98년에 쓰인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세밀화가들의 살인과 그 살인을 파헤치는 일화를 담고 있는 소.. 2020. 8. 6.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 리뷰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삶을 위한 게으름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 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일에 매어 생활했다. 일 중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생활은 이미 일(학생 때는 공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기 싫고, 지겹고, 지긋지긋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다가도, 하루를 알차고 성실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뿌듯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중독 증상이 꼭 생활이 피폐해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중독이 반드시 절제할 수 없을 만큼 (게임이나 도박, 음주와 같은)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만하고 싶지만 그만둘 수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정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달리 무엇을 해.. 2020. 8. 6.